'원칙은 큰 일에나 적용할 것, 작은 일에는 연민으로 충분하다.'
알베르 카뮈의 말이다. 요즘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예전에 뉴스에서 본 적 있다. 인천의 한 아파트 입주민이 자신들의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외부 초등학생들에게 '남의 놀이터에 오면 도둑'이라는 협박한 적 있다는 이야기다.
엄밀히 말하면 법적 사유시설을 외지인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어긋나 보이지 않겠다. 그래도 꼭 그래야하나 싶긴 하다.
나이가 지긋한 어른에게 반말과 무례한 언행을 하는 청소년의 이야기도 있다. 자신이 법적으로 문제될 것 있냐고 따져드는 일. 혹은 공공 장소에서 약간의 벌금이나 조사 정도면 해결되는 민폐들.. 엄밀히 말하면 '범법'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법대로 해라'가 것이 언제나 '옳다'고 할 수 없다.
'원칙'에는 어긋나는 일이겠으나 '사람사는 모양'이라는 것이 원칙만 따져가며 살아 갈 수는 없다. 큰 일에는 반드시 원칙이 필요하겠지만, 작은 일에는 연민으로 충분하다는 '카뮈'의 말에 백번 공감한다.
조금더 깊은 사색해보자면 자신에게는 '원칙'을 가지고 타인에게는 '연민'을 가지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살다보면 꼭 반대로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는 연민을 두고 타인에게는 원칙을 두는 경우 말이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연민'은 '관용'을 갖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큰 실수도 간혹 눈감아 줄 수 있어야 하는 듯 싶다.
최근 운동을 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날에는 무지 귀찮은 날이 있다. 어떤 날에는 스스로와 주변을 속이고 싶은 날도 있다. 그 유혹과 정도의 경계는 아주 아슬아슬하여 여차하면 넘어가기 쉽상이다.
비슷한 상황에 흔들리는 사람에 대해서는 냉정한 모습을 스스로 갖고 있진 않은지 생각하게 된다. 관용없는 원칙은 극단적 비행을 불러 잃으킨다. '그 어떤 역병도 분노만큼 인류에게 큰 대가를 치르게 하지는 않았다'는 세네카의 말처럼, '타인'에 대한 분노나 혐오는 '연민'을 가지치기한 원칙에서 출발하지 않을까 싶다.
그냥 최근 나의 일상이나, 각종 뉴스만 보더라도 그런 생각이 자주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