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왜 이스라엘에서는 고철을 유치원에 버리게 됐는가_후츠파

by 오인환


IMG%EF%BC%BF9836.jpg?type=w580




'후츠파'란 '히브리어'로 '뻔뻔함, 대단함, 배짱'이런 의미를 가진다.



어핏 '몽리'와 비슷해보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몽리'는 남의 손해를 이용해서 부당한 이익을 얻으려고 고집부리는 것을 뜻하지만 '후츠파'는 긍정적인 의미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살면서 이런 '후츠파'는 꽤 중요한 덕목이라고 보여진다.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꽤 '뻔뻔해지는 경우'가 있다. 다른 예시를 들 것도 없이 내가 그런 듯 하다.



오늘 학교에서 '학부모 참관 수업'이 있어 다녀왔다. 아이들이 짧은 연극을 준비하고 각각 자기 의견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눈이 빠지게 우리 아이들을 지켜봤다. 집에서는 그렇게 씩씩하던 아이들이 학교에서 꽤 수줍음 많고 소극적인 모습을 보았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는데 불현듯 어린 시절 나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의 통지표에는 '내성적'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꽤 까불거렸던 것 같은데, 어른들에게는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듯 하다.



한창 어휘를 배워가던 시기, 통지표에 있는 '내성적'이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 어머니께 물어봤던 적 있다. 그때 이후로 스스로를 '내성적인 사람'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지금이야, 꼭 그렇진 않다.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지만, 낯을 가리느라 말을 못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해외 유학 시절 생존하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냈던 나의 두번째 가면이 '정체성'에 녹아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여하튼 쭈뼛대며 소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아이를 보며 내가 떠올랐기에 '피는 못 속이는구나' 했다.





IMG%EF%BC%BF9837.jpg?type=w580




내면 깊은 곳에 그러한 성격이 '열등감'으로 자리 잡았는지, 아이들이 유치원을 다닐 적이면 '아이가 혹시 내성적인 성격인가요?'하고 묻곤 했다. 아이의 엄마와 아빠 둘 다 '외향적인 사람'은 아니기에 무의식적으로 '내향'은 나쁜 것, '외향'은 좋은 것으로 여겼던 듯 하다.


저도 모르게 여러 번 같은 질문을 했었던지, 어느날은 유치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님, 내향적인 게 꼭 나쁜 건 아니에요'



그랬지만 나는 '그래도 혹시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죠?'하고 되물었던 기억이 있다. 살다보면 '뻔뻔해야 하는 상황'이 존재한다. 가지고 싶은 것이 외부로 보여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누군가가 그 몫을 가져가더라도 '내것은 아니였어'하고 말았다.



이제 제법 나이가 들고나니, 그 과거가 얼마나 '미련' 했는지, 싶다. 어쨌건 20대를 기점으로 나의 성격은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는데 그렇다고 내향적으로 변한 건 아니다. 다만 '필요한 말이라면 반드시 한다'의 식으로 변했다.



뻔뻔함을 가르쳐야 된다는 유대인의 사고방식에 꽤 공감했다. 타고난 성향이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런 경우에는 '외부'의 간섭으로 성향을 바꿀 수는 없고 알게 모르게 주입되는 상황적인 교육이 가장 좋은 듯하다.



'누군가가 메시지를 주입하지 않고, 스스로 깨닫는 것처럼'.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알은 스스로 깨면 새가 되고 남이 깨면 후라이가 된다,는 말도 있다.



참관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아이를 기다리는 입장에서 '왜 너는 발표를 하나도 못하니!'라는 말은 삼키기로 했다.





IMG%EF%BC%BF9838.jpg?type=w580




'인발 아리엘리'의 '후츠파'는 유치원에 쓰레기를 버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꽤 그럴싸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어른들이 버리는 폐기물 중 일부는 아이에게 굉장한 호기심을 준다.


가령 고장난 자동차라던지, 전자기기도 그렇다. 어른들에게는 쓸모를 다해버린 아이템이겠지만 아이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놀이의 재료가 된다.



그저 어른들의 시선에서 폐기물이 된 그것을 파기하는 것 보다 아이들에게 전달하여 두번째 사용을 하게 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라고 여겨진다.



특히나 우리집에선 아이들이 다 쓴 '화장시 심'을 꼭 버리지 못하게 한다. 그것을 발견 할 때마다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것이 나의 일이지만 앞으로는 그러면 안되겠다는 생각도 한다.



가끔은 '막무가내', '뻔뻔함' 혹은 '촌스러움'과 같은 것들이 무기가 되는 경우가 있다. 항상 깨끗하고 안전하고 아름다운 세상만을 아이에게 보여주기에 부모의 능력과 수명이 너무나 짧다.



아이는 부모로부터가 아니더라도 배우게 될 세상이 있다. 마치 차가운 물에 들어가기 전에 심장에서 먼곳부터 천천히 몸을 적시다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갑작스러운 '냉탕'을 만나기 전에 천천히 아이가 그런 세상을 만날 수 있게 끔.



아이에게 적당히 지저분한 상황에 노출시키고 적당히 문제 상황에 맞딱드릴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다정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_다정한 사람이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