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 후 식기는 세척기에 놓는다. 당번을 정해 아이에게 침대 정리를 시키고 가볍게 아침 정리를 시작한다.
로봇청소기, 식기세척기, 세탁기, 공기청정기를 동시에 돌려 놓고 아이는 학교 가방을, 나는 헬스가방을 들쳐매고 밖으로 나간다.
아침 운동시간 한시간 반.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면 깔끔하게 집안 정리가 되어 있을 것이다.
헬스장에서 샤워 시간은 대략 10시가 넘는다. 그 시간에 청소를 해주시는 사장님이 계신다. 어떤 분들은 '고생하십시오!'하며 밖으로 나가는데, 나의 경우에는 오랜 기간 그냥 조용히 나가곤 했다.
그러다 문뜩 '수고하십시오'하고 인사를 드렸다. 돌아오는 대답이, '네, 좋은 하루 되십시오' 하신다.
그냥 상투적 인사말이겠지만 '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말로 하루를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가방에는 속옷과 다음 운동에 필요한 세팅을 미리 해둔다. 더블백을 현관 신발장 아래에 쑥 밀어 넣는다.
컴퓨터에 앉아 글을 쓴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을 정하고 주간 캘린더에 입력한다. 동시에 스마트폰과 워치에 일정이 저장된다.
이제 할 일 목록을 하나씩 해내고 남은 시간, 하고 싶던 일들을 해 나아간다.
문뜩 '까르마'가 떠올랐다. 별것 없다. 자아를 셋으로 분해하여 '지시 자아', '하는 자아'와 '받는 자아'로 설정한다.
'지시 자아'는 이렇다. 해야 하는 일을 이성적으로 명확하게 설정한다. 그리고 지시한다. 명령을 To do list에 하달하고 '캘린더'에 설정한다. 지시하는 자아는 행동하지 말고, 받지도 말며, 그저 공통의 선을 위한 최선의 지시만 하달한다.
'하는 자아'는 이렇다. 지시 받은 '해야 할 일'을 무지성으로 행한다. 차례차례 설정된 순서대로 그냥 행동하기만 한다. 거기에는 아무런 가치판단, 생각, 감정도 느끼지말고 그저 시키면 시키는대로 움직인다.
'받는 자아'는 이렇다. 지시하는 자아와 하는 자아가 '의무'를 행했으면 여기에 따라오는 달콤한 열매는 '받는 자아'가 받는다. 여기에는 아무런 '지시'도 하지말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말고 그저 주어진 상황에 주어진 환경에, 주어진 혜택을 명료하게 즐긴다.
셋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그저 스스로 해야 할 몫을 할 뿐이다.
'지시 자아'는 아침에 눈을 뜨고 점심식사를 하기 전까지 존재한다. '하는 자아'는 점심 식사 후부터 퇴근 전까지 존재한다. '받는 자아'는 퇴근 후 부터 존재한다.
이렇게 자아를 셋으로 나누면 모든 것이 너무 명료해진다.
이성적인 '지시자아'는 아침 시작과 동시에 '미래'를 생각하고, '하는 자아'는 일상에 '감정'이나 '게으름'에 굴복 당하지 않고 최선을 다 할 수 있다. '받는 자아'는 모든 일과를 마치고 편안하게 '책'이나 '영화'를 볼 수 있고 조용히 음악을 들어도 좋다.
여기서 까르마란 '지시'하지 않으면 '행동'이 무너지고, '행동'이 무너지면 '받는 것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아침에 '수고하셨습니다'라고 했더니, '좋은 하루 되세요'하신다. 스스로가 좋은 하루가 되라는 축복을 받고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좋은 하루되세요' 혹은 '수고하세요'와 같은 가벼운 인사를 먼저 건내는 편이 좋다.
깔끔한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다면 '귀찮음'을 느낄 새도 없이 청소를 몰아서 해야하고, 쉬면서 일하고 싶지 않다면 최대한 행동하는 자아가 최선을 다해 일을 마쳐 주어야 한다.
일을 시키려거든 '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쁜 사람'에게 시키라는 말이 있다. 바쁜 사람에게 일을 시켜야 더 효율적으로 일을 더 빨리 처리한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해야 할 일은 24시간에게 나눠 줄 것이 아니라, 기왕 일하고 있는 자아들에게 몰아주는 편이 낫다.
그리고 저녁시간이 되면 주어진 상황에 온전히 몰입하고 즐기는 편이 낫다.
지시자아는 명령만 내린다.
하는자아는 판단하지 않는다.
받는 자아는 충만히 감사함만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