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시인의 '너를 아끼며 살아라'는 '시집'이면서 '에세이'다.
지금껏 나태주 시인을 대표하는 몇몇의 시와 시인의 여러 생각이 담겨 있다.
나태주 시인의 문장 속에 '194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지드'의 표현이 소개됐다.
"시인은 오얏 열매, 자두 열매를 보고서도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다."
부족한 수면 시간과 어떤 압박감에 사로 잡혀 굉장히 예민해져 있는 요즈음, 이 문장을 만나니 스스로를 살펴보게 된다.
지금 자라고 있는 아이를 보건데 구름 모양만 봐도 '꺄르르' 거리고 별 시덥잖은 이야기를 가지고 '아빠, 아빠' 부르며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는 듯 한다.
분명 나에게도 그런 것이 흥미이고, 재미 있던 시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달리는 말처럼 '목표지점'이 아니면 아무것도 안보이는 사람처럼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당연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아이들이 궁금해 하는 '달 모양이 변하는 이유'라던지, 꼬물거리는 흙속에 개미들도 그렇다.
'저게 왜 저렇지?'라는 호기심을 갖고 바라 볼 때는 한없이 신기하고 시간가는 줄 모르겠는 것들이, '몰라.. 원래 그런가보지...' 하고 바라 볼 때는 하찮고 비생산적이고 의미없는 것들로 바뀌어 버린다.
어느 순간부터, '숫자'에 얽매여 사는 스스로를 보게 됐다. 나이, 몸무게, 가격, 가치.. 뭐 이런 것들...
그런 것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그냥 다수의 관념으로 만들어낸 허구의 약속일 뿐인데, 그것이 '본래' 그것의 '가치'였던 것 처럼 생각한다.
'시'를 읽는 것의 매력은 이런 것 같다.
'상대의 의도'에 집중할 필요가 없이, '스스로의 의미'를 찾아가는 일...
어떤 소설 혹은 글은 '필자의 의도'를 찾아내는 수수께끼 같을 때가 있다. 해당 문장이 어떤 의도로 쓰였는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가 몹시 중요해지는 글이 있다. 그 의도를 놓치고 그 의미를 모르면 글 전체가 가지고 있는 모양을 놓친다.
그 긴장감을 가지고 한줄 한줄을 읽어내야 하니, 정작 '사색'의 시간을 놓치게 된다.
비록 '시'는 문장은 비어있으나, 그 빈 공간에 사색을 채울 수 있어 좋다. 짧은 글은 짧게 쪼개어진 현대의 시간에 더 알맞은 듯 하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젊은이들이게 '녹차'를 마시기를 권했단다. 어쩌면 벌컥벌컥 들이키는 아이스 아메리나노, 콜라보다 느릿한 녹차를 음미하는 것이 '천천히 느끼기'를 연습할 수 있어서지 않을까.
오늘도 몇번을 '버럭'했으나, 자극적인 것에 길들어져 있다보니 자극적인 반응이 길들어지는 것은 아닌가 싶다.
'시'를 읽고 '따뜻한 음료'를 마시면서 다시 느릿한 호흡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을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