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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Mar 23. 2021

[계발] 성장을 꿈꾸는 너에게

열심히답이 아닐 때 읽는 책

 잘못된 1만 시간의 법칙은 자칫 우리의 삶의 소중한 시간을 앗아가게 한다. 책의 부재는 '열심히 답이 아닐 때 읽는 책이다.' 이 책은 구글 초창기 엔지니어 출신이자 현재 중 국고 ㅏ미국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우쥔이라는 사람의 글이다. 글의 글은 '무조건 열심'이 정답이 아닐 때, 훑어볼 수 있는 여러 관점들을 제시한다. 성공은 1만 시간의 노력이 만든다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여기서 1만 시간이란 충분한 물리적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무의미한 1만 시간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을 설명하는 사람이 전 구글의 초창기 엔지니어라는 사실은 이 주장에 강력한 근거가 된다. 우리가 1만 시간을 강력하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에 선행돼야 하는 몇 가지가 있다.

 세상은 아주 빠르게 변한다. 그것을 무시하고 혼자만 열심히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도태되는 일이이다. 책에서 말하는 여러 가지 계발 중에 인상 깊은 몇 가지가 있다. 저자가 말하는 자기 계발 중 하나는 이제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해결하는 시대가 지났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면 혹은 기술 하나만 있으면 먹고 산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곤 했다. 물론 그 오래된 상식이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기 계발서를 읽으면 스스로를 더 낫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과도 원활하게 협력할 수 있으며 더 많은 소통을 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혼자 책상 위에 틀어 박혀 혼자만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이뤄내겠다는 야망은 이제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소통이라는 창구는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하더라도 직접 얼굴을 맞대고 하는 의사소통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제는 소통의 창구가 넓어져 여러 플랫폼에서 영감과 자극을 받기 충분해졌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 세상으로 넘어왔다. 또한 코로나 19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빠른 속도로 온라인으로 넘어왔다. 그런 의미에서 온라인의 중요성은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라인만이 모든 것에 해답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물론 온라인도 중요하지만, 반대의 경우에서 오프라인에서 시장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에 저자는 츠타야 서점을 예로 들며 모두가 온라인으로 사업을 확장해 때, 오프라인으로 수익을 내고 성공한 것을 예로 들었다. 마치 온라인이 만병통치라도 된 듯, 모든 것의 정답은 온라인에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 요즘, 그의 예시는 매우 적절했다. 그에 호모 옴니 쿠스의 저자인 송승선 작가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무경계 인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온라인에서만 살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오프라인에서의 삶을 포기할 수 없다. 이론적으로 완벽한 온라인으로의 시장 확대는 결코 온라인이 해결하지 못할 어떤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자면 무언가 신문물이라거나 신기술이라는 것도 아주 기초적인 것 그리고 원시적인 기반 위에 쌓여 있다. 우리 인간은 결과적으로 완벽해지고 싶지만 실제로 그 과정에서 완전해질 수 없는 불완전성을 가지고 있다. 엄청난 인공지능을 개발해내는 과학자도 연필과 종이를 물리적으로 '직~직~'긋어가며 인공지능을 개발할 것이고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난 뒤에도 시골에 그 어떤 누구와 같은 방식으로 뒷 일을 처리한다. 자동차가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던 자율주행을 하든 말든, 길 위에 있는 못을 밟으면 터진 바퀴를 때우기 위해선 오프라인 매장을 찾아야 한다. 마치 이 책은 모든 것을 기록하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오랜 시간 직장생활을 하며 깨달은 바에 의하면 일 할 대, 효과적인 방법은 대게 단순한 것들이라고 한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장 최고의 것들이다. 내가 중학교 시절, 우리 학교에 굉장한 우등생이 하나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갑자기 선생님께 질문을 해대는 그 친구를 보면서 많은 친구들이 과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친구의 결과는 항상 상위권이었다. 

 우리는 자신이 하지 못한 어떤 것을 이루는 사람에게 자신이 갖지 못한 어떤 것이 그들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나름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불가항력의 어떤 존재가 있어야 그들보다 자신이 못하다는 것에 위안을 받는다. 가령 공부를 외계인처럼 잘하는 친구를 보며 '머리가 좋다.', '타고났다' 등의 말을 많이 한다. 사업을 통해 성공한 사람의 뒤에서는 '시대를 잘 만났다.', '운이 좋은 사람이다.', '부모가 능력이 있다' 등 나와 다른 어떤 부분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앞서 말한 그 우등생 친구의 노트를 보고 나는 그런 것들이 다 자신의 열등감을 가리기 위한 변명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친구의 노트는 예쁘게 정리되어 있지도 않았고 엄청난 비책이 적혀있지도 않았다. 그저 지저분하게 자신만이 알만한 괴상망측한 문구들이 잔뜩 적혀 있었다. 그의 노트에는 라면 국물도 묻어 있었고 밭에서나 만질법한 흙도 묻어 있었다. 이 친구는 과연 이 노트를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봤던 것일까 생각하게 됐다. 어느 날은 그 친구가 화장실을 다녀오고 선생님께 질문이 있다고 그 노트를 들고 뛰어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친구의 손은 젖어 있었는데 친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젖은 손을 대충 옷에 닭고 눅눅하게 노트 위에 글을 써 내력 갔다.

 연예인 토크쇼를 보면 화려한 뒷 배경을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정작 연예인들이 바라봐야 하는 장면은 뜨거운 조명과 셀 수 없이 많은 카메라들, 자신들을 동물원의 동물처럼 쳐다보고 있는 방송 관계자들일뿐이다. 정작 그들은 화려함 속에 살지만 그 뒤를 돌아 화려함을 쳐다보지 못한다. 한 번의 공연을 위해 리허설을 몇 차례를 하기도 하고 몇 분짜리 방송을 내보내기 위해 수 시간을 촬영하기도 한다. 화려함의 이면에는 언제나 반댓면이 있는 법이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최선의 것이다. 화려함만을 취하고 싶다고 내가 바라보는 모든 면과 후광이 다 화려해질 수는 없다. 내가 누군가가 화려해 보인다는 것은 그 뒷면에 수많은 노력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운동에는 스티킹 포인트라는 것이 있다. 바벨을 가슴 위에서부터 머리 위로 밀어 올리는 도중에 갑자기 힘이 약해지는 지점을 말한다. 운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경험해 봤을 이 포인트를 트레이너들은 놓치지 않는다. 자신의 한계에 도달되어 더 이상 마지막 하나를 들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에서야 발전이 이루어진다. 

 무하마드 알리는 하루에 윗몸일으키기를 몇 개씩 하느냐고 하는 질문에 '나는 윗몸일으키기 개수를 세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아프기 시작할 때에야 세기 시작한다.'라고 말했다. 책의 어느 말처럼 '이미 아흔아홉 걸음이나 와 놓고 왜 마지막 한 걸음을 포기하려고 해?'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끝내 포기하고 싶은 그 마지막 한 번의 순간 뒤에 기회가 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보석이 귀중한 이유는 많은 이들이 100번의 곡괭이 질을 채우지 못하고 99번 이젠에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참아낸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그 기회는 당연히 사회적으로 값어치가 있을 수밖에 없다. 

 고대 그리 리스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을 주장한 인물이다. 지구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그의 주장은 종국에 와서는 틀렸다고 밝혀졌지만 그가 주장했던 논리의 근거가 워낙 확실했기 때문에 그 예견의 지구 운행 주기는 100년에 하루 정도의 오차가 생길 뿐이었다. 그런 정확성은 인류가 지동설을 받아들이는데 엄청난 시간을 가지게 만들었다. 인간은 기껏 해봐야 한 세대밖에 살지 못한다. 그는 인류 전체의 역사로 봤을 때, 실패한 사람으로 남아 있겠지만, 그가 죽고 나서 지동설이 생겨나기 전까지 그를 논파할 수 있는 논리는 쉽게 나오지 못했다. 그 뒤로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게 정의한 세상에 대한 정의를 하고 살았다.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확실히 맞는지 틀렸는지는 결코 빠르게 알 수 없다. 또한 지금 맞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생각 또한 언제까지 정답일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믿는 진리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하루와 하루에 집중하는 편이 좋다. 최종의 목표와 성과를 바란다면 우리는 굉장한 허무주의에 빠져들지도 모른다. 

 책은 꼭 꿈같은 이야기만 할 것 같지만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계속해 내 간다. 돈에 관련한 이야기가 그렇다. 동양에서는 돈에 대해 터부시 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자신이 입을 옷 한 벌하지 못하지만 스스로의 직업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에 대해 굉장한 미화를 한다. 하지만 돈은 몹시 중요하다.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지만 자유가 돈에 필려나갈 수는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에 충분히 자신이 갖고 있는 돈의 일부를 내어 놓는다. 따지고 보자면 돈을 많이 소유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것을 넘겨주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매번 공부를 한 답시고 도서관에 틀어 박혀 있는다고 해서 돈이 벌리진 않는다. 우리의 두발은 현실에 두고 두 눈을 이상에 두어야 한다. 우리를 움직여주는 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결국 먹고사는 정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반드시 어느 정도 풍족한 삶을 영위해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에 대한 욕심은 '탐욕'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권장해야 할 사항인지도 모른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꽤 많은 부분을 메모했다. 그 부분을 모두 적어두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나는 중국인의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중국어에서 한국으로의 번역체가 덜 익숙해서 그런 것 같다. 가령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들도 기본어가 한자다 보니 한자어가 많이 나오기 때문인데, 이 책은 술술 읽힌다. 중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중국에서 나오는 계발서들도 많다. 계발서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이 책은 저자가 직접 경험하고 자신의 지인드로부터 듣고 다양한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들을 모았다. 결코 다른 책들에 보다 도움이 많이 되는 책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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