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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Apr 16. 2021

[에세이] 설득은 글자수와 무관하다

어른은 아니고 서른입니다 독후감

 일러스트가 새까맣게 칠해진 책. 글 보다 그림이 많은 책. 이런 책을 보면서 '누가 이런 책을 사?'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적어도 빽빽하게 많은 말과 글로 나를 설득해 내는 책이 좋은 책이라 믿었다. 어떤 건 1초에 넘어가는 페이지도 있는 이런 책이 다른 책들과 값이 비슷하다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책의 뚜껑을 덮으면서 생각했다. 아니다. 불필요하게 말 많은 책들보다 짧은 글과 넉넉한 그림으로 사색의 시간을 더 많이 주는 이 책이 더 좋은 책 일 수도 있겠다 싶다. 이제 서른이 된 작가의 일러스트와 짧은 글로 아주 평범한 일상을 기록한 책이다. 특별하게 누군가를 위로하고 있지 않다. 어찌 보면 나의 어제와 오늘 같은 개인 일기장 같은 무난한 페이지를 가볍게 넘겼다. 더 이상 글을 읽어 넘기고 싶지 않은 하루에 그래도 무언가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독 하지 못하고 다음 날로 완독 일을 넘겨버리는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책을 선택한 듯하다.

 '휙! 휙! 휙!' 넘어가더니 먹먹.. 해진다. 비슷한 페이지의 글자 수 빽빽한 다른 책들보다 더 많은 위로가 된다. 생각해보면 심리학 용어니, 사회과학 현상이니를 운운해 가며 어렵게 나를 이해시키려는 책들에 비해 훨씬 설득력 있다. '서른'이라는 말... 돌 이어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서른은 뒤로 어느 정도 돌아가야 하는 나이다. 서른이 되던 친한 형을 보고 끔찍하다는 소리가 절로 났었는데, 나는 그 나이를 훌쩍 넘어버렸다. 언제나 나는 나이 없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문뜩 생각해보면 세상은 가끔씩 나의 나이을 일 깨워 준다. 불현듯 몇 번을 정신 차릴 때마다 알 수 없는 속도로 중간 기억만 떠오를 뿐, 빠르게 여기까지 건너왔다. 지나왔다는 생각보다는 건너뛰며 온 듯 중간 기억이 사라진 나의 인생에 나는 어린 시절 '어른'이던 서른의 벽을 후다닥 하고 넘었다. 서른이면 어떨 것이다라는 감성도 느끼지 못하고 30대의 절반을 넘어왔다. 생각해보면 얼마 전까지 나는 지나치게 많이 웃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오죽하면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것이 '웃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 정도였다.

 문뜩 화장실에서 비치는 나의 얼굴을 보았다. 무표정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오늘 하루 내가 몇 번을 웃었나? 심지어 웃었다 하더라도 그 웃음에 진심은 몇 번이나 남겨져 있는가 생각해보면 그리 많지 않다. 나만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사이, 주위를 둘러보면 내 주변의 개구쟁이 친구 녀석들도 웃음이 많이 없다. '허허'하고 공하게 웃는 웃음에 '웃기다'는 들어있지 않다. 어쩐지 친한 친구를 만날 때조차, 진짜 내 감정에 충실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험을 잘 봤던 친구 녀석에게 '찍은 게 잘 터졌나 보네?'하고 넘겨 웃던 농담은 이제 없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축하한다.', '잘됐네~' 식의 형식적인 인사들만 남는다. 진심이 빠진 축하금을 전하고 나면 '일하나 치렀다.' 정도로 기억될 의미 없는 축하를 해주고 나는 다시 돌아서서 무표정한 일상을 보낸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 '계란 옷이 잘 묻힌 분홍 소시지', '적당하게 면이 불은 라면',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하던 TV 프로그램' 소소한 일상이 많았는데, 이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고 생각해보니, 일단 그런 일차원적인 건 시시하게 일상이 되어버리고 '돈', '명예', '지위'와 같은 어른들을 움직이는 검은 자극에 길들여져 있지 않은가. 어른이 아니라고 말하기엔 나도 어른이 된 것일까. 세상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개인적인 일들은 있다. 다 그저 그렇게 잘 살고 있는 것 같은 SNS에서도 모든 사람마다 사연이 있다. 나의 SNS를 보며 '저 사람은 참 잘 살고 있구나!'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겠다. 극도의 행복함을 끄집어내어 사진 한 장에 담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악하면 사진을 제외한 검은 부분만 현실에 남아 씁쓸해진다. 

 군대 있던 시절, 한 일병이 종교 행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나의 계급은 병장이었는데, 앞서 말한 일병은 터벅터벅 걸어 나오며 자신이 겪어봤던 군생활에서의 팁을 후배들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제가 얼마 되지 않은 군생활을 해보니, 인간관계가 참으로 중요하더라고요.'로 시작한 그의 말 뒤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던 그의 이야기가 기억이 나질 않았던 이유는 나와 내 주변 동기들이 그의 첫 말에 비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병 찌꺼기가 군생활을 했으면 얼마나 했다고...'로 시작하던 우리의 잡담 뒤에 그 일병은 뒤로 물러섰다. 지금 나의 나이는 30대다. 가장 일을 많이 할 때고 이제 막 이등병이라는 햇병아리 시기를 벗어나 '군생활 쫌 하긴 하고 있네'라는 일병 계급쯤이다. 열심히 해도 잘하지 못하고 잘해도 기쁘지 않던 그 시기는 가장 힘들지만 어쨌건 지나갔던 시기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의 나이가 40과 50, 60이 넘었다면 아마 파릇파릇한 일병을 바라보던 군 시절 병장인 나처럼 '아직 젊은 놈이...'하고 귀엽게 넘어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도 그들의 나이가 되어 지금의 내 나이인 친구들을 공감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7살 부모님이 과자를 사주시지 않아 속상했던 마음도 진심이고 15살 중간고사를 망치면 속상했던 나의 마음도 진심이다. 나이가 들어보니 더 많은 풍파를 겪어 그 정도는 별일 아니라고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진짜였다. 종지 그릇을 겨우 채운 몇 숟 물도, 태평양을 겨우 채운 바닷물도 모두 그릇을 가득 채워 넘치게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채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란 상대적인 것이고 그릇이 크기가 커졌다고 물이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상처와 성인의 상처는 상대적이다. 어쩌면 나는 나이를 먹으며 나의 그릇을 더욱 키우고 더 많은 물을 담을 수 있는 나이를 만들어 가겠지만 더 많이 담아진 물에서 비슷한 정도의 상쳐를 갖고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40이 돼서도, 50이 돼서도...

 어쩌면 내가 독후감으로 쓴 이 글이 본 책에 적힌 글자의 수 보다 훨씬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에서 받은 감성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걸 보자니 이 책이 정말 좋은 책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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