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오래 달리기를 하다 보면 처음부터 전속으로 달리는 친구를 보곤 한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친구들을 재껴나가지만 얼마 후에 만날 결승선에서 가장 늦게 도착하곤 한다. 우리는 본질을 잊을 때가 있다. 시험기간이면 공부보다 깨끗한 노트 필기가 먼저인 경우를 선호하는 친구를 보기도 하고 행복하기 위해 돈을 벌면서 결국 돈을 벌기 위해 불행을 택하곤 한다. 골을 넣어야 승리하는 축구 게임에 개인기 연습만 열중하는 경우나 돈을 벌어야 할 사업가가 열심히 했다는 과정에 만족하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종종 '과정 만족의 함정'에 빠진다. 본질은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다. 실력과 취업이라는 본질을 잊은 취준생은 '자격증 따기'와 '연수 경험'이라는 과정에 만족하고 도피성 '석사'와 '박사' 또한 마찬가지다. 최선을 다한 과정이 있다면 결과쯤은 괜찮다는 시답잖은 위로에 만족하며 본질을 잊고 겉도는 행위에 집중한다.
결과가 아닌 과정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더 큰 결과인 '행복한가'에 대한 목적 달성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일 뿐이다. 어쨌건 모든 건 본질이 중요하다. 물리학의 근본과 근본을 따지고 들자면 결국 '빅뱅'으로 수렴하는 것처럼 삶의 본질과 본질을 따지고 들자면 결과적으로는 행복이라는 근본에 도달한다. 결국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행복을 위한 것이고 행복이란 매우 이기적인 만족도다. 누군가를 돕더라도 결국 본인이 그것에 기쁜 마음이 생긴다면 그 또한 이기적인 행복이다. 이타적인인 마음에 의한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은 결국 자신의 행복에 관한 것이고 가족과 지인, 친구, 아내, 부모, 자식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하지만 큰 의미에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쪼개 놓은 작은 목표 덩어리에서도 본질의 의미는 분명하게 존재한다.
시험을 앞둔 학생이나 돈을 버는 직장인, 가사를 하는 주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일에 본질을 잊는다. 학창 시절 시험문제를 풀다 보면 사실 가장 중요한 건, '목차'다. 이것은 비단 시험문제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책을 읽을 때, 나는 본격적인 페이지를 들어가기에 가장 앞서 '작가 소개', '들어가는 말', '목차'를 확인한다. 결국 이 한 권의 글이 어떤 이유로 쓰였고 어떤 방식으로 흘러갈 것인지 본질을 파악이 된 후에서 책을 읽는 것은 아무런 배경 없이 책을 읽는 것과 마지막 페이지를 닫았을 때 감상이 다르다. 완벽하게 만족하고 읽었던 책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작가 대중을 선동하기 위해 쓰인 글이라면 그 프로파간다에 명확하게 복종하는 하나의 독자가 되어 버린 샘이 된다. 결국 글을 읽는 행위는 글쓴이의 목적에 도달하거나 정보를 전달받기 위한 본질을 갖고 있다. 그 본질의 상위계층에 견문과 사고의 확장의 목적이 있다. 그 상위 계층에는 주체적인 사고와 자유를 위해서인데, 그 본질에 도달하지 못하는 악수가 생기곤 한다.
본질은 쉽게 '진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좋은 의사는 '마음씨 좋은 의사 선생님'이 아니라 진료를 잘하는 의사다. 좋은 변호사는 '주말마다 종교활동을 열심히 하는 변호사'가 아니라 '수임받은 사건에 승소하는 변호사'다. '좋은 목수'는 가정에 충실하고 좋은 아버지이자 좋은 남편인 목수가 아니라 나무를 잘 다루어 좋은 집을 짓거나 기구를 만드는 사람이다. 역시나 좋은 영어 선생님은 아이들의 인성을 책임지고 예의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영어를 잘 가르치는 사람이다. 그 본질을 잊은 사람은 결국 좋지 않은 사람이다. 예의는 바르나 진료를 하면 언제나 사람을 죽일 만큼의 오진을 하는 의사는 나쁜 의사다. 사람은 좋고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나 음식 실력이 형편없어서 도저히 한숟도 들 수 없게 하는 요리사 또한 좋은 요리사가 아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회 구성원으로서 나쁘다고 말한다.
이런 본질은 상대적이라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좋고 나쁨은 분명하게 달라진다. 우리는 좋은 아버지와 좋은 의사가 동시에 되고자 하고 좋은 목수이자 좋은 남편이 되고자 한다. 다만 상황에 따라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본질인 기업활동을 위해 '좋은 사장님'과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 '좋은 친구'이기를 모두 포기했다. 우리 인간이 하루를 살 수 있는 유한한 시간의 한계는 24시간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어딘가에 그 시간과 노력을 쏟아 넣느냐에 다라 해당 본질에 밀도는 달라진다. 우리가 욕심을 버리라고 하는 것에는 많은 의미가 있으나 그중 가장 크게 다뤄야 할 욕심은 상충되는 두 가지를 모두 취하려는 욕심이다. 낮의 밝음과 낮의 어둠을 동시에 갖고 싶은 욕심은 허무맹랑한 망상일 뿐이다. 결국 상충되는 두 가지 본질 중 가장 자신에게 필요한 본질에 100을 쏟아 넣는 행위가 그 분야에 완전한 성공을 이룬다. 다만 다수의 사람들은 성공을 말하면서 반대쪽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어 70과 30의 어설픈 열정을 쏟아 넣어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뿐이다.
'알쓸신잡'에서 뇌공 학자로 출연한 '장동선' 박사 님이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해당 교수님과의 면담 일화를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가족'과 '커리어' 그 두 개를 가지는 건 힘들다. '둘 중 하나를 아주 처참하게 찢어 버려라.' 그는 그 이야기를 듣고 유학을 멈추고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나 또한 짧게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이유로 비슷한 선택을 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인생의 방향이 크게 달라졌다. 결국 반대쪽에서 완전한 냉혈한으로 낙인찍혀 처참한 평가를 받아들일 자신이 없으면 두 가지 본질에 어설프게 걸치며 평범한 일생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본질은 그렇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욕구와 시험을 잘 치고 싶은 욕구.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구와 충분한 휴식과 일상을 누리고 싶은 욕구. 많이 먹으면서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싶은 욕구.
그 본질에 집중하는 행위에 비범한 누군가를 조금이라도 흉내내기 위해서는 다만 주어진 시간의 본질에 충실하는 수밖에 없다. 일하는 시간에는 집에 갈 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무지막지하게 일을 해야 할 것이고 적어도 시험기간에는 무지막지할 정도로 공부를 해야 할 것이며, 반대의 경우에는 또한 무지막지할 정도로 자비 자비 없이 휴식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본질을 쪼개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범함은 물론 평범함도 유지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집에서는 일 생각을 하고 일터에서는 집 생각을 하는 본질의 반대에 되는 메커니즘을 탈피하기 위해 다수의 성공한 혹은 행복을 이루는 이들의 습관은 명상(meditation)이다. 어원처럼 medi-는 중앙을 뜻하며 결국 한쪽으로 치우치기 직전에 저울의 중심을 맞추는 행위와 같이 마음의 중심을 잘 잡고 비록 시작하면 한쪽으로 잽싸게 열과 성을 쏘아붙이는 일이 행복과 성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그 나며 겨우 잡아 볼 여지가 생기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