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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내가 필사나 필기를 못하는

by 오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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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 모음이 대체로 긴 편입니다.'



어린 시절 글씨가 악필이라 많이 혼이 났다. 그 뒤로 글씨는 콤플렉스가 되었다. 손글씨를 보여주는 일이 창피한 일이 되었다. 글씨체 때문에 혼나는 일은 성인이 돼서도 생기곤 했다. 특히 강의, 강연을 하거나 간단한 필기를 할 때 애를 먹기도 하고 혼자 보는 내용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내용을 전달해야 할 경우에는 일단 글씨로 메모를 해 두어도 다시 전화가 올 것을 감안해야 했다. 상대도 불편하고 나도 불편한 이 글씨체 때문에 중요한 내용을 전달해야 할 때는 한참 신경 쓰느라 애를 먹는다. 영어 글씨체는 조금 다른 편인데, 시작하는 대문자가 비정상적으로 크다. 세로획을 위에서 아래로 '휙'하고 내릴 때, 시원시원함을 남겨야 글을 쓴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멋을 내려고 일부러 이렇게 글을 쓰거나 특이해 보이기 위해 과장하는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글씨체가 멋있는 아버지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따라 했던 적이 있다. 아버지의 글씨체에도 세로획이 길었다. 한 번 꺾고 시원하게 내려가는 아버지의 글씨체를 보고 따라 해 보고 연습해 봤던 적이 있다. 아버지의 글씨체처럼 세로획이 지나치게 긴 글씨체를 지금은 갖게 되었지만, 아버지처럼 글씨체가 멋지거나 하진 않는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께서 여동생 보고 글씨를 배우라고 하실 만큼 걱정이셨다. 나름의 콤플렉스로 여동생의 글씨체를 따라 연습한 적도 있었다. 여동생의 글씨체는 자음이 모음 대비 크고 둥글둥글했다. 어느 정도 훈련을 했지만 빠르게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김없이 나의 본 글씨체로 돌아왔다.



지금도 나의 서재에는 글씨체 연습에 관한 책들이 있다. 무의식적으로 지금도 그에 대한 컨 플렉스가 남아 있는 듯하다. 키보드 타자는 영문자와 한 글자가 모두 빠른 편이다. 요즘 컴퓨터가 생겨서 그런지 이런 악필도 글을 매일 쓸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글을 쓰는 일을 일부러 피하곤 했는데 세상 참 잘 만난듯하다. 글씨로 학교와 집에서 혼나던 아이가 책을 벌써 세 권이나 냈으니 말이다. 어린 기억을 또 떠올려 보자면 연필심에 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친구들 중에는 4B연필로도 글을 많이 쓰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나는 워낙 글을 쓰다 보면 손가락에 핏기가 없을 정도로 꽉! 쥐고 쓰던 탓에 손이 아프기도 했지만 글씨가 두껍고 지저분했다. 최대한 연필심이 연한 걸 골라서 써도 항상 진했다. 내가 글을 썼던 뒷면에는 꾹꾹 눌러진 자국이 남곤 했다. 샤프심을 고를 때도 가장 연한 심을 고르고 펜도 가장 얇은 펜을 사용하곤 했다. 근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의 노트북에도 펜이 달려 있고 태블릿에도 펜이 달려 있고 스마트폰을 처음 사용한 날부터 지금껏 계속 펜이 달려 있는 스마트폰만 고집하며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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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 that different'



오늘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레지스탕스 사형수들의 마지막 편지'라는 책을 읽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북부에서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가 사영 선고를 받아 죽은 이들이 총살 전에 사랑하는 이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들을 모아 둔 책이다. 책은 컴퓨터 활자로 나에게 전달되었다. 글을 읽는데 이 편지를 전달받은 가족에게는 그 글을 담고 있는 내용만큼이나 글씨체가 주는 감동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언제든 난중일기의 이순신 장군의 생각을 컴퓨터가 찍어낸 활자로 언제든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내용 이전에 글씨체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내용보다 더 큰 것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된 위인들의 글씨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쩐지 그의 의식과 무의식을 함께 접하는 듯하여 한참을 감성에 젖곤 한다. '레지스탕스 사형수의 편지들'와 난중일기 읽으면서 그런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왠지 그들이 남긴 메시지에 영혼을 덜어 낸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감동을 주기는 한다.



진짜 영혼이 담겨 있는 글은 글씨체에 담겨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무심코 남긴 글씨체에도 내 무의식과 의식이 담겨 있는 흔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별로 자랑할 글씨체는 아니지만 그냥저냥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 바꾸려고 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데, 생각해보니 불편하긴 하지만 큰 에너지를 들여 바꿀 필요는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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