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라는 것도 목성에서 보기엔 한 점일 뿐이다)_사피엔스
하노 벡의 '인플레이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등. 책의 마지막 뚜껑을 덮으면서, '다른 차원의 책'라고 생각되는 책들이 있다. 두께가 얼추 비슷한 자기 계발서나 알맹이 없는 일기장 같은 책들이 이 책들과 비슷한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는 데는 놀랄 만큼 독서의 위대함이 녹아져 있다. 누구나 2만 원 안쪽으로 이 처럼 위대한 내용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현대 문명의 기적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점은 19세기 후반에나 되어 나왔다. 가까운 조선시대만 보더라도 책은 국가에서 비영리 목적으로 발행했고 이를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쇄술이 발전하지 못한 중세에서는 궁핍한 사람들이 책을 구하지 못해 독서를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물며 우리라 '스테디셀러'라고 취급할법한 '대학'이나 '중용'과 같은 이름난 책은 기록상 강 면포 3~4 필과 오승목 1등을 주어야 구매 가능했다고 한다. 이 가치를 산출해보자면 20세기 기준으로 1마지기 논에서 산출되는 쌀의 양이 1 섬이라고 했을 때, 논 2마지기 3마지기에서 소출되는 쌀의 양과 값어치가 비슷하다고 하니 대략 1마지기 당 평균적으로 1 섬(대략 70kg 정도)의 쌀이 생산된다고 봤을 때, 2~3마지기의 쌀 생산량은 대략 140~210kg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지금도 20kg짜리 쌀 한 포대가 5만 원 정도 하니, 쌀값이 비교적 저렴한 지금의 가격으로 보더라도 50만 원은 족히 줘야 한다. 물론 당시의 물가 상황을 놓고 비교하자면 터무니없이 숫자 장난이겠지만 말이다.
태종 13년에는 임금이 서장관 진준에게 '삼국지'와 '소자 고사'를 구해오라고 명했다고 한다. 이처럼 외국 서적을 국내로 들여오는 것은 임금이 직접 나서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으며 조선은 비교적 선진국이던 중국에 서적에 대한 수입을 꾸준히 요청했다. 세종 8년에는 명의 황제가 '사서 대전'과 '오경 대전', '성리대전'. '통감강목'을 하사했다는 대목이 있는 걸 봐서 문명국의 지위를 잇기 위한 대학자들의 글은 권위를 상징했다. 다만 이런 책을 구했다고 하더라도 조선말 기준 문맹률은 90~95%에 달했다. 즉, 글을 읽는 행위는 '돈'만으로는 불가능하고 권력을 비롯해 기본적인 문해력을 갖춘 5~10%의 지배층만의 소유물이었다.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불과 8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80%에 달했다. 그러다 1959년에 돼서야 겨우 22%대로 떨어지고 책과 서점이 보급화 되었다. 유발 하라리의 글을 '한국어 번역본'과 더불어 '원서'까지 읽은 이유는 앞서 말한 이유로 독서가 주는 묘한 승리감 때문이다. 쓰는 사람의 문자를 같은 감성으로 읽어 낼 수 있는 것은 지금에서야 의미가 없지만 과거의 기준에서는 굉장히 의미 있는 행위다. 이 책을 한국어 번역본으로 처음 읽었을 때가 잊히지 않는다.
비록 책이 분량이 많고 두껍지만 너무 쉽게 읽히고 너무 재밌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두꺼운 책을 아껴가며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을 한국어로 읽을 때는 휴일 밤낮없이 읽어서 이틀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 원서는 처음 겁이 나긴 하지만 생각보다 어휘가 어렵거나 하진 않다. 또한 어려운 어휘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씩 찾아보지 않고 문맥상 이해가 가능하다. 나는 이 책을 몹시 좋아함으로, 한국어 종이책, 영어 종이책, 한국어 전자책, 영어 전자책, 한국어 오디오북, 영어 오디오북. 이렇게 6권을 구매하고 소장 중이다. 심지어 전자책은 아이디가 다른 전자책 디바이스에 따로 구매해서 총 2권이 더 있다. 인류의 역사를 객관화하여 '사피엔스 종'의 역사로 기술하는 기술법은 굉장히 흥미롭다. 수백만 년의 인류 역사가 과연 한 권의 책으로 요약이 가능할까 싶지만 분명하게 가능했다. 심지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다룬다. 종교, 철학, 과학, 산업 등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를 꼼꼼하고 심지어 상호 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연계가 잘 되도록 다룬다.
내가 좋아하는 유튜버 중에 '조승연 작가님이 계신다. 그는 사피엔스가 차갑고 냉철한 책이라며 우리 시대의 문화적 지도자격인 '실리콘벨리'의 기술자들이 '사피엔스'를 최고의 책으로 꼽는 것에 무서운 일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그도 이 책을 좋게 평가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점에서는 나와 생각이 조금 다르기도 했다. 사실 유발 하라리의 책은 '사피엔스'를 완독 후에 3권을 또 구매했다. 그 3권 모두 오디오북과 원서를 함께 구매했으므로 총 18권을 더 구매한 샘이다. 이 책의 목적은 분명 사피엔스의 시간 순서로의 역사의 기술이다. 하지만 읽다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커다란 이슈나 문제들이 한 점처럼 보인다.
우리가 말하는 '부'나 '빚'들은 현대 우리에게 커다란 역할을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따지고 보자면 인간이 사회체제 유지를 위해 만들어 놓은 일종의 '상상의 매개체'라는 것이다. 국가, 돈, 종교를 비롯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은 실제로 인간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사회질서와 위계를 위한 산물들은 사람과 사람 간의 약속일뿐이며 상상력이라는 허구라고 그는 말한다. 아마 조승연 작가가 지적한 부분도 이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 이슬람교로 갈등과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고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빚'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며 '부'라는 보이지 않는 현상에 우리는 동경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사회 결집을 위해 만들어낸 인간의 허구라는 접근은 분명 이성적 이어 보이기는 하지만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메마른 땅처럼 보이기도 한다.
머리를 말리면서, 차에서 시간을 죽이다 말고, 아이 유치원 하원 차를 기다리면서, 아이 목욕물을 욕조에 받는 시간에... 짬짬이 1분, 5분씩 읽었던 사피 엔서 원서를 드디어 수개월 만에 완독 했다. 어떤 누군가가 보기에는 다독을 하는 이유가 시간이 많다거나 속독을 한다거나 한 권을 오래 잡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짬짬이 시간 병렬 독서는 이처럼 어려운 책도 쉽게 집어 들고 완독 할 수 있는 힘을 준다. 개인적으로 총 균 쇠, 이기적인 유전자를 비롯해 내가 좋아하는 책들은 모두 원서와 전자책, 오디오 북으로 소장 중이다. 이 책들 모두도 세계 다수가 느꼈던 보편적 감성을 얻기 위해 원서로 읽어 볼 요량이다.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읽는다면 분명 어느 정도 후에 포기할 테지만, 이처럼 이유를 다른 곳에 둔다면 원서 완독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