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율아! 선물이야~' 라고 말하고 책을 건내줬다. 다율이는 고민할 새도 없이 색연필을 갖고 와 앉았다. '수호깨비'의 하얀 얼굴에 '초록과 검정색'을 칠하기 시작했다. 아마 선물을 주신 분이 봤으면 기분이 나빠하셨을까. 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선물받은 책이다. 아이가 초록색과 파란색으로 수호깨비의 얼굴을 낙서하는 동안, 나는 스마트폰으로 아이를 촬영하기만 했다. 몇 해 전, 책을 보는 아이에게 조언하는 한 엄마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책은 소중하게 대해 줘야 해' 그녀는 책의 끝을 접는 아이에게 말했다. 이 장면을 보고 드는 생각이 있다. 바로 내 어린시절 '노트'에 관한 일화다. 어린 시절, 형형색색으로 필기를 하던 노트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첫페이지'였다. 본질을 잃고 예쁘게 꾸미는 게 목적이 된 노트에서 첫 페이지가 예쁘지 못하면 나는 그 장을 '북~'하고 찢고 새로 사용하곤 했다. 마치 새 것인 것 마냥 그 노트를 활용하기를 몇 번을 하다가 노트 한 권을 제대로 채워 본 적 없는 멍청한 습관을 되뇌였다. 그 뒤로부터 나는 '내것'이라고 확신되는 것에 '내 흔적'이 묻는 일을 피하지 않는다.
새로운 학기가 되면 아이들은 새로운 노트에 새로운 교과서와 학습지를 받았다. 마치 박물관에 있는 고대서적이라도 취급하듯 페이지 한장 한장을 조심히 넘기던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바로 가운데 부분을 꾹!하고 누르고 엉망인 글씨를 써대기 시작했다. 지금도 새로운 수첩을 사용할 때, 나는 첫 페이지에 최대한 엉망인 글씨로 아무렇게나 쓴다. 이처럼 내가 편해야 자주 사용하고 오래사용할 수 있다. 언제라도 새로운 '호텔방'은 기분내기 좋지만, '거주'하기 적합한 곳은 아니다. 불규칙 속에 규칙을 찾듯, 대충 이것 저것 들어있는 잡동사니 상자에서 손톱깎이를 기가막히게 찾아내거나, 이리저리 뒹굴어다니는 TV리모콘의 행방을 몇 번의 고민만으로 금방 찾아내듯, 내것만이 갖고 '나의 생활패턴과 흔적'이 오래 지속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사물과 상황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은 그래서 중요하다. 책은 쓰임을 다해야한다. 책의 쓰임은 '보관'이 아니라, '사용'이다. 아마 거의 대부분의 물품들이 그렇겠지만, '사용'되지 않은 건, 내것이 될 수 없다.
가끔은 아이들이 '징검다리'를 만든다며 서재에 있는 온갖 책들을 모두 꺼내 서재부터 거실까지 펼쳐 놓을 때가 있다. 그리고 책들을 밟고 지나다닌다. 그러다보면 책이 찢어지기도 한다. 이런 행동에 잔소리를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설정해 놓은 '쓰임'에 그 물품의 정체성을 한정시켜 놓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야 한다. 라면의 면을 먹기 위해, 젓가락이 필요하고 국물을 마시기 위해서 숟가락이 필요하다는 식의 생각으로는 나무젓가락만 딸랑 주는 편의점 라면의 국물을 마시지 못하는 결과가 일어난다. 나무젓가락이야, 만든이의 의도가 어찌됐건, 병을 따는 병따개의 역할로 쓰건, 라면을 떠먹건, 반으로 부러트려 이쑤시개로 사용하건 그건 사용자의 몫이다. 제한이 없는 상태에서 물품의 활용은 그것을 더욱 편하게 만들고 활용도를 높게 만든다. 내가 이이의 동화책을 읽어 줄 때 또한, 이런 비슷한 방식을 취한다. 독서를 '작가'의 의도대로 파악하는 건, 본질'이 아니다. 독서의 본질은 '즐겁고 의미있는 시간'이다. 아이들이 유치원을 갔다오면 '늑대와 아기염소'의 이야기에서 '늑대'가 아이염소의 집에 찾아간 이유가 '잡아먹기 위해'라고 배우곤 한다. 나는 아이들이 들고 온 책을 내 멋대로 각색한다. 그리고 읽어 줄 때마다 이야기는 달라진다.
따지고보자면 이런 독서법은 내가 책을 읽는 방식이기도 하다. 나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착한사람이 성공하는 법칙'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독후감을 썼다. 본질은 그렇다. 역사책을 읽어서 경제를 이해하건, 철학을 이해하건 그건 글쓴이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책의 본질을 '사용'이다. 우리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보글냠냠 요리사' 책이 가운데 부분이 찢어졌다. 울먹거리는 하율이를 보며 찢어진 부분을 이용하여 또 다른 스토리텔링을 전개했다. 아이는 그것으로 '상처'가 될 사건을 '재밌는 3D 이야기'로 바꿔 경험했다.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은 그래서 중요하다.
'책을 읽을 때는 45도 각도를 유지해야하고, 책상위에서 허리를 반듯하게 펴야 한다고 한다. 눈 나빠지지 않게 밝은 곳에서 조용하고 차분하게 읽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스마트폰은 어두운 밤에 엎드려 하도록 도와준다. 매우 잘못됐다. 도서의 본질도 아닐 뿐더러 제약도 많다. 책은 화장실에서 보던, 서재에서 보던, 누워서 보던, 앉아보던 그건 보는 사람이 편한 방식으로 보는게 가장 좋다. 책을 접던, 낙서를 하던, 찢던 아이가 책을 사용하는 방식에 있어 자유롭게 해 줘야한다. 우리 아이들은 '책'보다 '유튜브'를 더 좋아한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날 갑자기 유튜브를 끊고 책만 읽으라고 강요할 순 없다. 짜장면을 좋아하고 된장찌개도 좋아한다고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는 강요와도 비슷하다. 어떤 날은 어떤 걸 택하고 싶고, 어떤 날은 또 다른 걸 택할 수 있는게 삶의 다양성 아니겠는가. 물론 부모의 마음으로써 아이가 영상보다 책을 더 봤으면 하지만, 우리 아이가 이미 치즈피자를 좋아하는데, 된장찌개만 강조할 수는 없다. 그저 스스로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많은 옵션들에 노출시키고 보여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