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독후감
[인문] 영혼을 담는 그릇, 뇌_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내 다리가 나의 다리라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알고 있는가. 잘려진 손톱은 나에게 붙어 있을 때 까지 나였다가, 버려진 순간 '내'가 아닌게 되는가. 쓸데없는 고민으로 인생을 허비한다는 'INFJ-T'타입의 전형의 망상은 가끔 심오한 방향으로 빠져들어간다. '자아'에 대한 고민은 철학의 출발점이다. 먹고 살기 바쁜시기 짬짬이 이런 고민을 하고 본다. '나는 누구인가' 명상 기법 중에는 '의식확장'을 훈련하는 기법이 있다. '자의식'을 확장하는 방법을 말하는데, 쉽게 말하면 이렇다. 만약 우리에게 누군가가 연필 한 자루를 쥐어주며, 최대한 빨리 팔기를 바란다면 우린 누구에게 먼저 이 연필 한 자루를 팔아야 할 것인가? 정답은 '나'이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가 연필 서 너 자루를 준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이 연필을 팔아야 빨리 팔 수 있을까? 정답은 '가족'이 아닐까 싶다. 만약, 쥐어진 연필이 열댓 자루라면 누구에게 팔까? '친척'이지 않을까? 연필의 갯수를 확장해 가다보면, 그 다음 순서로는 '친구', '지인', '마을', '지역', '국가', '세계'로 뻗어 나간다. 이렇게 넓어지는 이유에는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의 확장으로 같은 '연결성', '연대감'있는 이들에게 느끼는 믿음이 나를 도울 것이라는 '믿음'말이다.
자의식의 확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속의 '나'에서 출발하여 의식을 확장해 가다보면 상대도 내가 되고, 지나치는 나무와 자연도 내가 되며 세상 만물이 나로 확장된다. 자아의 세계를 내 '육체' 안에 가둬 놓는 것은 영혼이 작은 단지 속에 고여있는 것과 같으며 고여 있는 물을 곧 썩기 마련이다. '나'라는 존재를 확장하는 일에는 '이타성'이 생긴다. 다른 누군가를 '나'와 동일시 함으로 더 많은 영향력과 부를 얻을 수 있다. 다른 이들의 원하는 바에 쉽게 접근이 가능하고 그들의 감정에 쉽게 동화되고 이해할 수 있다. '자아'의 확장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이유 때문이며 나의 영혼의 거주 공간을 넓히며 썩지 않도록 하는 소중한 체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아와 영혼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드라마와 영화처럼 반투명한 색깔의 육체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을까. 시각화해야 겨우 설득을 할 수 있는 영상매체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영혼이 마치 우리 육체의 모양을 닮고 있을 것이며 이것이 반투명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혼이란 '자아'이며 '형체'가 없고 '의식'에 가깝다.
게임을 하는 청소년을 보자. 그들은 실존하지 않는 세상에 그들의 캐릭터에도 자아를 심어 놓는다. LED 3색 발광다이오드 모듈이 순서대로 깜빡이는 현상 속에 자신의 영혼을 녹여 낸다. 3색이 만들어낸 착시가 '캐릭터'라는 존재를 형상화하고 우리 아이들은 이 캐릭터에 자아를 심어 낸다. 게임 상, 캐릭터가 공격을 받으면 '자아'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고 '감정'을 동요시켜 화를 불러 일으키거나 기쁨을 주기도 한다. 이런 가상현실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불빛의 조화에 자의식을 확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와 3년 전 내가 잘라버린 손톱 끝 중에 어느 것에 나의 자아가 더 담겨 있을까. 자아란 '육체'를 쉽게 벗어 날 수 있는 법이다. 여기서 이 자아와 영혼이 자라나고 거주하는 단 한 곳의 신체를 꼽아보자면 '뇌'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나와 좋은 추억을 쌓던 어떤 이가 어느 날 갑자기 왜곡된 기억을 가진채, 나를 비난하는 모습을 본 적 있을까. 분명 둘이 함께 좋은 기억을 갖고 있던 사실이 존재 했음에도 어느 날, 한 쪽의 '정신적 문제'에 의해, '철천지 원수'가 되어버린다면, 그 얼굴이 담고 있는 추억 뒤에 영혼의 변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뇌 속에는 단순하지만 다양한 호르몬 변화가 존재한다. 우리가 기쁨과 사랑의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고 알고 있는 여러 호르몬 중에서도 과다할 경우 환각이나 망상을 느끼게 하는 경우도 많다. 세로토닌과 도파민이 그렇다. 세로토닌과 도파민은 사랑과 행복의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전달물질이지만 우리 뇌작동의 오류로 이것들이 과다하게 분비할 경우, '조현병(정신분열증)'으로 번진다. 세상은 조현병(정신분열증)을 위험하거나 치욕스럽거나 나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이 병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며 외부와 접촉을 차단하고 지난 사실을 왜곡하며 상대의 행동 하나하나에 숨은 의미를 부여하여 적으로 돌리는 일을 만든다. 우리가 뉴스로 접하는 것처럼 '정신병자'들은 부정적이거나 위험한 사람들이 아니라, 외롭고, 고립된 이들이다.
전문가가 보기에도 겉으로 멀쩡하게 보이는 노신사와 이야기를 꽤 오래해야 문제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정신병이 가진 슬픔과도 같다.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정확하게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추상적인 관점에서 이해를 통해 앞서 말한 호르몬 조절을 통해 적당한 불편함과 정당한 안정적임을 얻게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팔, 다리가 없는 사람도 있고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게중 '정신적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에 관해서는 '불편하다'와 비슷한 감정이 아닌 '위험하다'의 감정을 갖고 있다.
책은 여러 종류의 정신적 문제를 앓고 있는 환자의 케이스를 모아두었다. 아내의 머리를 모자로 착각하고 쓰려고 하던 멀쩡해 보이는 노신사와 자기발을 자기발이 아니라고 느끼는 환자의 이야기,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지능이 낮지만 숫자에 관해서 천재적인 천재의 이야기 등이 그렇다. 그들은 기억을 잃기도 하고 왜곡하기도 한다. 우리가 영혼이라고 말하거나 '자아'라고 말하는 것을 잃어버린 것 처럼 행동하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의 자아를 마치 '물리학'으로 구분지어 보자면 '뇌' 속에 있는 '호르몬'들의 활동이 아닐까 싶다. 만약 사고로 팔과 다리를 상실하게 된다면, 팔과 다리는 '나'에게서 떨어져나가 더이상 '나'로 취급받지 못한다. 그것이 비록 땅에 묻어 썩든, 벌레에게 먹히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나'라고 인식할 수 있게하는 '두뇌'의 손상은 '영혼'과 '자아'를 상실하는 일과도 같다. '정신질환'은 그런 측면에서 그 어떤 장애나 질병보다 슬프고 안타까운 병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정신질환 환우'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더 순화되어 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