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인간이 태어나면서 겪는 '생로병사' 중, 육체적인 고통이 4가지, 정신적인 고통이 4가지하여 총 팔(8)고가 있다. 육체적인 고통으로 태어나면서 겪는 생고, 늙으며서 겪는 노고, 병들어 겪는 병고, 죽음의 사고가 있다. 정신적 고통도 육체와 같이 4가지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애별이고,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원증회고, 아무리 원해도 얻어지지 않는 구부득고 그리고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이 치성하여 겪는 오음성고다. 이중 가장 큰 고통은 '애별리고'다. 세상사 만남이 있다면 헤어짐이 있다. 우린 마치 이별하지 않을 것처럼, 영원할 것처럼 감정을 소모하고 산다. 동양철학의 근본은 '음양'으로 우주의 모든 현상과 소멸을 설명한다. 밖이 있으면 안이 있고, 껍질이 있다면 속이 있고,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듯 떼어날 수 없이 하나의 완전체로 존재하며 섞이는 듯, 섞이지 않고 구별되는 듯 구별되지 않는 모호함에도 분명 양극이 존재하고 그 어떤 한 쪽을 꺼내어 들면 반드시 반댓쪽 극단이 따라온다.
지금만 존재할 것 같은 아름다운 만남들도 세대마다 존재했지만 그들 모두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별했다. 부모, 형제, 자식, 배우자, 친구, 모든 만남은 최초가 존재하고 최후도 존재한다. 영원하자는 약속은 우주가 탄생하고 단 한번도 이루어져 본 적이 없다. 마치 내 감정에서는 연결선 없는 점으로써 순간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고 쾌락이 있으면 불행이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듯,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이다. 만 스물에 가족, 친구와 헤어지고 익숙한 모든 것과 헤어지고 유학길에 올랐다. 거기서 만나게 되는 모든 만남에 열정을 쏟았다. 사람들의 여권 한 쪽에 쓰여 있는 '비자만료일'은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유통기한이었다. 아무리 마음 맞는 사람이 나타난다고 해도 그들은 국가가 정한 기간 내로 떠나야 했다. 거기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그만큼 그들을 떠나 보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어학연수 초기에 친하게 지내던 형이 둘 있었다. 그 순간이 영원하리라 착각하고 지내던 짧은 시간이 흐르고 그들은 돌아갔다. 지금은 그들의 이름도 가물가물하지만 당시 혼자 살던 플랫에서 그들에게 작별의 문자를 보내고 씁쓸히 앉아 시간을 죽이던 기억이 지금도 있다. 군대 훈련소에서 짧게 만났던 동기 녀석들은 마치 10년이나 안 친구들 처럼 마음이 통했다. 그들과의 만남은 기껏해봐야 4주였다. 같은 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가에게 반말을 하고 나이 어린 친구에게 동생 취급하던 그들은 이제 사회 어디에선가 그들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는 '남'이다. 그런 그들을 보내고 나 또한 다른 부대로 옮겨지는 버스를 탔을 때, 버스 창을 바라보며 눈물이 났던 적도 있다. 따지고 보자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상황에 쳐해진다는 것은 기존의 것들과 헤어짐을 뜻하기도 했다. 몇 번이나 실수하고 같은 일을 반복하면 학습되던 언어나 습관과는 다르게 '이별에 대한 감정'은 학습되지 않았다.
해외 체류 기간 중, 이별에 대한 감정 소모를 최소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만남의 기쁨을 줄이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으며 오래 볼 수 있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여 사람 사귐을 했다. 세상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흘러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현재 해외에서 한국에 와 있다. 고르고 고르던 그 좋은 관계들 또한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다시 처음이 되고 다시 또 누구를 만난다. 또한 그들이 영원하리라 믿고, 다시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별의 슬픔을 최소화하는 방법으로는 만남의 기쁨을 줄이는 방법이 유일하다. 마음의 문을 닫지만 이 마져 세차게 걷어차고 들어오는 이들도 존재한다. 꽉 닫아 둔 마음의 문이 허물어지면 다시금 그들을 맞이한다.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나가지 않을 것 같던 그들이 마음속을 헤집고 나갈 때는 폭탄 맞는 것 처럼 마음이 너저분 해진다. 영혼이 빠져 나간 것 처럼 들어왔다 나간 상처의 자리는 빠르게 회복되지 않는다.
아마 삶을 살면서 이런 과정을 수없이 더 겪지 않을까 싶다. 음양의 양극이 만남과 이별이라면, 이별이 갖고 오는 반대 극에는 새로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누군가를 알게 된다는 것은 새로운 우주를 아는 것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모두 각자만의 우주를 만들어 나간다.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고 그런 시선으로 만들어낸 새로운 우주는 완전히 내 것과는 다르다. 같은 객관적 우주를 살고 있는 듯 하지만, 모두가 서로 다른 우주를 살아간다. 그런 누군가의 우주와 내가 갖고 있는 내 작은 우주를 연결하는 만남은 참으로 고귀하다. 어쩌면 비록 헤어졌지만 그들과 공유한 시간과 감정은 내 속에 남아 내 다음 인연의 우주와 연결될 것이다. 비록 헤어지긴 하지만 나에게 공동의 시공간을 내어준 그들과의 기억이 다음 이들을 연결하는 교차점이 되면서 나의 우주는 그들의 우주들로 넒어져간다. 나는 내가 스치고 지나온 수많은 우주들의 평균값이라던데... 내가 만날 다음 우주는 어떤 이들이 되는가. 나는 또 누군에게 그만큼의 영향을 주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