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세기 1장 5절)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하시니 빛이 있었다"(창세기 1장 3절)
성경에 따르면 세상에는 빛보다 어둠이 먼저 존재했다. 어둠이 먼저 존재 했다는 사실은 앞으로 우리 삶에 빛이 남았음을 의미한다. '삶이 기적'이라는 평이한 말로 '삶의 기적'을 체험할 수 없는 시기가 있다. 남들 다하는 취직을 못하고 있거나, 남들에 비해 한참 미치지 못하는 급여 수준 혹은 작은 키나 외모를 비롯해 우리의 삶을 초라하게 만드는 여러가지 요인들 때문에 세상에게 희롱 당하는 패배적인 생각이 들때도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이런 외부적 불행은 언젠가 스치고 지나가고 소중한 추억이 되며 기쁜 날이 반드시 찾아 올 것이라고 위로한다. 막연하게 '뭐든지 잘될거야'라고 하는 의미없는 위로를 받는 것 만큼이나 그 시의 의미가 사라질 때 쯤이면 아마 우리의 뇌는 정확한 사물과 현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왜곡하고 있는 '망상증' 초기 단계나 다름없다. 대한민국에서 한 해 동안 실종하는 실종자수는 2만 명에 달한다. 대한민국 국민 2500명 중 한 명이 매년 실종된다.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 음주한 운전자에게 살해 당하는 사람도 한 해 600명이 넘는다. 축복을 받아야 할 출산의 과정에서 사망하는 산모도 한 해 28명이나 되고 남편이나 남자친구 등 사랑하는 남자에게 살해 당하는 여성 또한 한해 120명이나 된다.
사실상 우리가 지금 이렇게 무탈하게 살아서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천지신명, 부처, 예수, 알라 할 것 없이 감사해야 할 일이다. 삶이 무탈하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다. 손가락이 다섯 개가 붙어 있고 발가락이 다섯개가 붙어 있다면, 아이가 공부를 조금 못하거나 말을 듣지 않는 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 아니다. 돈이 있고 없고 또한 괴로운 일이 아니며, 취업이 되고 되지 않고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군대에서 혹한기 훈련을 가면 평소 줘도 사용하지 않던 손바닥만한 손난로가 왜 그렇게 감사한지 모른다. 인간은 아둔하여 행복을 건내줘도 행복한 줄 모른다. 삶의 상당부분을 불행으로 해석하고 확대하고 재생산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감사함을 모르는 것은 삶의 진짜 모습을 왜곡하는 일이다. 우리가 현재 숨시고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은 기적과도 같다. 살인을 당하지 않았으며, 심각한 병이 있지 않고 사고에서 자유롭다면 우리는 엄청난 행운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주하는 착각은 '행복의 상대성'이다. 가령 버스를 타고 가다가 운행 사고가 일어났을 때, 많은 사람이 죽고 혼자 살아 남으면 그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모두가 멀쩡하고 혼자만 크게 다치면 그것은 불행이라고 여긴다.
사실 행복이라는 감정은 상대적일 수 없다. 스스로 온전하게 느끼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 비하여 어떻다는 것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진짜 행복은 주변이 어떻든 스스로 완전한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다른 사람보다 키가 작거나, 다른 사람보다 벌이가 시원찮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보다 외모가 뛰어나지 못하거나 친구가 없다하더라도, 다른 사람보다 직업이 뛰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행복할 권리를 갖고 있다. 다른 이들과 비교적 '행복하다'거나 비교적 불행하다는 것은 자신의 행복의 잣대를 높여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이라고 여기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세계 상위 계층에 속한다. 몸에 걸칠 옷이 있고 잠을 잘 집이 있으며 음식이 차 있는 냉장고를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75%의 다른 지구인들보다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 휩쓸려 투옥당하거나 고문 당하지 않고 극한의 기아를 체험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다른 5억 명의 지구인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며 순교의 두려움이나 고문, 체포 없이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면 지구상 30억의 인구보다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지구에는 20억에 가까운 사람들이 글조차 읽지 못하는 문맹이다. 스스로 행복을 깨우칠 수 있도록 좋은 정보가 담긴 글을 읽고 하루의 기분과 감정을 정화할 수 있다면 이 또한 다른 이들에 비해 행복한 삶이다.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감정인 행복은 어떤 기준을 세우냐에 따라 언제나 달라진다. 하지만 완전한 행복이란 다른 누군가에게 기준을 둘 것이 아니라 혼자서 완전한 절대적 행복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