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카르마 강의 독후감
다소 종교적이다. 기대했던 내용은 아니다. '환생'과 '영혼', '사후세계'에 관한 내용으로 '카르마'를 이야기한다. 내가 생각하는 '카르마'란 무엇인가. 카르마는 산스크리트어로 업(Karma)를 말한다. 이와 반대되는 말로는 보(Vipaka)가 있다. 이를 통틀어 업과 보 즉, 업보라고 부른다. 종교적인 내용을 빼고 이야기 해보자. 업과 보는 명확하게 말할 순 없지만 조금 쉽게 말했을 때, 원인과 결과의 성격을 갖는다. 우리는 '업'을 짓고 그에 따른 '보'를 받는다. '착한 일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기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는 카르마 원리와 상관 없는 논리다. 카르마의 원칙은 지은 업에 대한 보가 반드시 따라 온다를 말할 뿐이다. 즉, 착한 일을 하더라도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고,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나쁜 일을 하더라도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카르마의 원리는 그저 업에 따른 보가 따라 온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는 동양철학에서 음양이론과 어느정도 맞닿아 있다.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하고 먹었으면 배설을 해야한다. 이는 단순한 인과관계다. 업을 짓되 과보를 받지 않으려는 것을 우리는 '욕심'이라 부른다. 가령 아이를 낳고 기르며 무관심 했다면, 이에 따른 과보인 '자녀와의 관계'에 대한 과보를 받아야 한다. 우리의 다수는 업을 짓어 놓고 그것에 대한 과보를 받기를 두려워 한다. 마치 빌려 쓸 때 생각치 않았던 갚는 일과도 같다. 마치 채권자가 내 돈을 갈취해 가기나 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 있지만, 실제로 자신이 먼저 빌려 쓴 돈일 뿐이다.
스님을 생각하면 대게 결혼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아이가 없다. 속세와 떨어져 살며 사회와 단절된 생활을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카르마, 즉 업을 짓지 않기 위해서다. 돈을 빌려 쓰지 않는다면 돈을 갚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번뇌라고 이르는 여러 감정은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생로병사 삶의 윤회 속에서 벌어진다. 그들이 번뇌하지 않는 방법으로 업을 짓지 않음을 최고의 선으로 여긴다. 그들은 아이를 키우지 않음으로써 자식과의 갈등을 삼지 않고 속세와 떨어져 생활하므로써 관계 속에서 벌어질 과보를 피한다. 결혼을 하지 않음으로써 결혼생활에서 벌어질 여러 갈등에 자유로우며 머리를 짧게 자르고 매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일상을 반복함으로써 어떠한 과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이처럼 모든 과보에서 자유로워지며 번뇌를 초월하는 일을 '해탈'이라 한다. 이처럼 모든 과보에서 자유로워지는 일이나 이미 과거에 지은 업장을 과보로 인정함으로 빌린 돈을 전체 상환하는 것을 '업장소멸'이라고 한다. 이를 종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면 환생과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로 빠진다.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기 전에 알 수 없음을 논외로 치부하고 보자면 카르마는 현생의 현상이며 몹시 중요하다.
우리가 하는 번뇌들은 모두 인과관계에 따라 형성된다. 좋은 일을 했을 때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보장은 '종교'에서나 있을 뿐이다. 카르마의 원칙에 따르면 좋은 업을 지으면 좋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더 높아질 뿐, '반드시 어떠하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종교적으로 이런 장치가 없다면 사람들의 '현생'에 대한 죄책감을 만들기 어려워진다. 좋은 일에는 좋은 과보가 따를 것이고 나쁜 일을 하면 보복이 따를 것이라는 '인과응보' 사상으로 선과 악이 분명하게 나눠져야 사람들의 도덕적 의식을 높일 수 있다. 만약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죄는 더욱 사악해지고 사회는 혼란스러워 질 것이다. 또한 누구도 선행을 배풀려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만인을 상대하는 특수성에 의해 쉽고 일반화적인 방법으로 전파되길 선호했다. 자극적이고 이분법적일수록 종교의 생존 가능성이 높아졌다. 만약 내가 지은 좋은 업이 꾸준하게 좋은 일로 나타나지 않거나 내가 지은 나쁜 업에 대해 나쁜 일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좋은 일에 대한 지속성을 잃어버리고 나쁜 일에 대한 경계심이 흩어질 것이다. 이에 따라 종교는 '환생'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착한 일을 많이 지으면 죽은 이후에 그 카르마에 대한 과보를 보상 받아 천당이나 지옥으로 갈 수도 있고 소나 말로 태어나 평생 일만 하고 살아야 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관념 속에 심어 놓음으로써 인간 자체에 대한 도덕의식을 높일 수 있었다.
나는 윤회사상이나 사후세계에 대해 있다거나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로써는 이에 대해 알지 못함으로 함부로 말할 수 없지만, 종교 또한 현세의 인간들의 문화 중 하나로 여기는 현대 세계에서 이를 역사적 관점으로 바라봤을 뿐이다. 사람은 살아갈수록 '업'을 짓고 '보'를 받는다. 이는 떼어낼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다. 유리컵에 물을 담으니, 유리잔에 물이 채워지는 것이고 불 위에 물을 끼얹으니 물이 꺼지는 것이다. 어려운 용어와 종교적 세계관을 통해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이미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자연현상일 뿐이다. 맛있는 것을 많이 먹었으니 비만이 생기고 태양볕에 오래 있었으니 피부가 새까맣게 꺼지는 것처럼 일종의 자연현상일 뿐이다.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과보를 주시나요.'가 아니라 내가 지은 업(카르마)가 무엇이며 업장 소멸을 위해선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를 통해 현생의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 책은 기대를 하고 읽었던 책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종교적인 분위기가 많이 느껴지는 책이라 다소 실망했던 감은 있다. 하지만 내가 느꼈던 느낌만이 정답이라고 볼 수 없고, 카르마에 대한 쉬운 인식을 다수의 사람들에게 전달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읽고 즐기길 바란다. 종교와 독서에서 맹신은 철저하게 경계하되, 좋은 점을 차용하고 배우고 나와 다른 부분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보자. 오랫만에 신선한 주제의 책을 읽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