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인환 Dec 06. 2021

[생각] 김치는 우리 음식이 맞는가?


 얼마 전, 김치가 우리의 고유 음식이 맞는지에 대해 뜨거웠던 적이 있다. 중국의 '파오차이'가 김치의 원조라는 이야기가 중국으로부터 시작하여 논란이 됐다. 해당 이야기는 '김치'로 시작했으나, '반중'으로 이어졌다. 대중은 실제 김치의 원조가 어디인가에 대한 관심보다 '반중'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떠올릴만한 사건이 하나 더 있다. 흔히 '인천 여경 사태'으로 알려져 있는 '경찰의 층간소음 흉기난동 부실대응'이 그렇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혐오'와 '갈등'으로 이야기는 확산됐다. 현상에 촛점을 맞추다보면 본질이 흐려진다. 어째서, 김치의 원조에 대해 '반중'으로 이어지고, '경찰의 부실대응'이 '여경무용'으로 이어지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역사는 5천 년이 맞을까. 우리 호모사피엔스의 유전적 증거에 따르면 마지막 빙하기(10만 년 전)에는 인간의 호모사피엔스의 개체는 1천 명에서 1만 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다시 기원전 7만 년 전에는 인도네시아에서 토바 화산이 폭발하여 6년 동안 겨울이 찾아왔다. 이 폭발로 다시 살아남은 인류의 개체는 수 천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 뒤로도 인류는 개체 수를 꾸준하게 늘리지 못했다. '우리'를 어디로부터 정의할 것인가. 19세기 북미대륙에는 '루이지애나(프랑스령)이 현재 미국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 루이지애나는 프랑스 역사에 속하는가. 미국의 역사에 속하는가. 어머니가 한국인이고 아버지가 독일이며 일본에서 태어나고 매년 국적을 바꿔가며 자랐다면 그는 한국인인가. 독일인인가. 국가의 영토는 조금씩 형태와 규모를 달리해 간다. 



 '덴뿌라'는 해산물과 채소 등을 튀김옷으로 입혀 튀겨낸 일본요리다. 과연 '덴뿌라'는 '일본요리'가 맞을까. 일본에서 이런 튀김류에 붙인 이름이 '덴뿌라'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해산물과 채소를 튀김옷으로 튀겨 먹는 지역은 일본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어디에나 있다. '요리'에 국적이 존재 할 수 있을까. '프렌치프라이'가 프랑스 요리인지, 벨기에 요리인지, 미국 요리인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한다. '프렌지프라이'는 감자를 기름에 튀긴 요리일 뿐이다. 이 방법에 국적이 있을 수 있다. 어느나라 사람이 먼저 먹었는지로 그 국적을 정하는지, 어느나라 사람이 많이 먹는지, 어느나라 사람이 먼저 만들었는지로 그 국적을 정한다는 것을 허무맹랑하고 말장난 수준 밖에 아니다. '오월동주'의 사자성오로 유명한 월나라는 원래 중국 대륙에 있던 국가였다. 수도를 '저장성'으로 두고 있었을 만큼 동북에 위치하고 있던 '월나라'는 현재 '베트남 민족'이다. 영토를 기준으로, 민족을 기준으로 국적을 정하는가? 그렇다면 국적이란 또 무엇일까. 국적이란 그저 한 국가의 소속된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국가는 일정한 영토에 거주하는 다수인을 갖고 통치 조직을 갖고 있는 단체를 말한다. 우리의 국적은 '대한민국'일 뿐이다.



 '김치는 우리의 음식이 맞을까?'라는 고민에 앞서, '우리'라는 모호한 정의가 잘못됐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모두 한복을 착용했으나, 우리는 특정한 날에만 한복을 착용한다.' 여기서 '우리'는 명확히 '조선시대 사람들'과 분리된다. 즉, '우리'는 정의하기 나름의 언어 형태일 뿐이며, 목적에 따라 다르게 정의된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미일 3국동맹으로의 '우리'가 존재하고, 동양과 서양에서의 '우리'가 존재한다. '성별갈등', '남북', '한일', '한중', '기독교', '불교' 등 혐오와 증오의 감정이 극대화 될수록 비슷한 것끼리 결집한다. 그리고 다른 것들을 '혐오'하고 '증오'한다. 점차 이런 사회 분위기가 만연해지면 '다양성'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다. 네덜란드는 예로부터 '다양성'의 나라로 유명하다. 이곳의 수도인 암스테르담은 도시 인구의 절반이 170개 국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국적으로 이뤄져 있다. 이처럼 다양성을 포용하는 지역은 항상 진보해 왔다. 중세 이전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그랬고, 20세기 도쿄와 뉴욕이 그랬다. 전 구성원이 획일된 사고를 하는 지역일수록, 문화 포용력이 약한 지역일수록 고립되기 쉽다. 



 어떤 나라가 '김치'의 기원이 자국에서 시작했다고 주장했다고 해서, 그 것의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다. 마치 지나가던 행인이 나의 왼손을 보고 자기 손이라고 우기는 것처럼 말이다. 굳이 어떤 문제가 크게 비약될 때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번째로는 '아래에서부터의 구조적 이루어짐'이고, 두번째는 '위에서 부터의 설계'이다. 첫번 째는 그저 사회에 암묵적으로 동의해오던 '혐오'의 감정이나, 숨겨져 있던 '표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경우고, 두번째 경우에는 정부나 언론이 의도를 갖고 행했을 때 일어난다. 대부분의 사회 현상은 이 두 현상으로 일어난다. 철새들이 한마리 리더의 리드에 따라 하늘을 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본 적 있다. 사실 이 철새에는 '완전한 리더'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제일 앞서가는 첫번째, 철새를 총으로 쏴 죽인다고 하더라도, 철새는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서로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되 그 모양이 얼핏 누군가의 리드로 움직이는 것 처럼 보일 뿐이다. '우리'라는 말은 내부 단합을 굉장히 유리하게 만든다. 우리 학교, 우리 학원, 우리 나라, 우리 세대. 이는 우리에 소속되지 않은 다른 집단을 철저하게 배척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만약, 김치가 우리의 음식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말할 것이다. 중국의 음식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감자튀김은 한국음식이고 French Fries는 미국 음식이며 Potato Chips는 영국음식이다. Frite는 프랑스 음식이다. 어떤 식재료와 어떤 식재료를 섞었는지는 국적이 없다. 다만, 흔히 '피자', '파스타'하면 이탈리아가 떠오르고 '김치', '불고기'는 한국이 떠오르고, '스시', '우동'하면 일본이 떠오르는 것처럼 그저 모호한 형태일 뿐이다. 시간을 거슬러 100만 년으로 올라가면 그 땅에 있던 '사피엔스'는 그저 수렵과 채집을 통해 날것을 혹은 익힌 것을 먹는 수준이었다.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 '우리'로 정할 것인지의 모호한 경계가 없어지지 않는다면, 주변국에서 말하는 '우리의 것이다'라는 주장에는 대응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그저 오늘 그것을 누가 수요하고 생산하고 이익을 보고 있는지 현실적인 문제에 더 고민하고 대응하고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수필] 고재경 교수의 20년 전 생각 모음집_걷자생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