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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Dec 28. 2021

[철학] 도를 아십니까?_도덕경


 노자도덕경은 대략 5,170여개의 한자로 이루어진 얇은 책이다. 200자 원고지 26매도 되지 않으니, 빽빽하게 적어 넣으면 A4용지 안에 모두 들어가게 되어 있다. 여기에는 '도경'과 '덕경'으로 나눠져 있다. 이를 통칭하여 '도덕경(道德經)'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사서삼경, 성경, 불경' 처럼 경(經)으로 끝나는 '글'이 있고, '춘추좌씨전'처럼 전(傳)으로 끝나는 '글' 그리고, '대학, 소학'처럼 학(學)으로 끝나는 글, 논어처럼 어(語)로 끝나는 글, 사서처럼 서(書)로 끝나는 글, 이기론과 같이 론(論)으로 끝나는 글 등이 있는데, 이는 각기 쓰임이 다르다. 논어는 공자의 말(語)을 어록의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기론은 성리학의 이론 체계를 설명(論)하는 글이고, 대학과 소학은 가르치기(學) 위한 글이며, 춘추좌씨전은 해석하고 전달(傳)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물론, 이 밖에도 글의 쓰임에 따라 부르는 명칭은 엄청나게 많지만, 모두 나눌 수는 없다. 어쨌건 '경(經)'이란 쉽게 말하면 '원본'을 의미한다. 이런 원본은 해석에 따라 다양하게 쓰이는데 이런 원본을 해석한 책을 또 전(傳)으로 부른다. 도덕경은 말 그대로 도에 관한 글과 덕에 관한 글의 원본이다. 보기에 따라 굉장히 지루하거나 난해하게 보여질 수도 있는 이 책은 '경(經)'의 특색처럼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이런 경(經)은 당연히 다양한 해석을 만들어 낸다.



 도덕경(道德經)에는 '도(道)'와 '덕(德)'이 있다. 그렇다면 '도(道)'는 무엇이고, '덕(德)'은 무엇일까. 일단, '도(道)'부터 시작해보자. 도(道)는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는 어떤 것'을 이야기한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생기기도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참 난해하다. 공부가 깊은 사람들은 이 말을 읽고 명쾌하게 깨닫지만, 보통의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기에 조금 더 쉽게, '이름없고, 정의 할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이고 정의를 해보자. 도(道)는 '하나(Uni)를 뜻한다. 즉, 우주의 원리라고 대략 개념을 잡아보자. 우주(Universe)의 어원은 '하나'를 의미한다. 모든 것을 통칭하는 하나인 우주를 굳이 나눠 보자면 '일음일양(一陰一陽)'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음양(陰陽)이다. 더 쉽게 설명해보겠다. 우리의 태극기를 보면 가운데 빨간색과 파란색의 태극문양이 있다. 이 태극문양은 정확하게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양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곡선의 형태로 어느부분은 볼록하게 들어가고, 어느 부부분은 볼록하게 나왔다. 음과 양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흔히 말하는 '그라데이션(gradation)'처럼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까지 변화하는 농도의 단계와 차이가 있다. 뜨거운 물 위에 차가운 물을 부으면 명확한 구분점이 없이 뜨거운 아랫부분과 차가운 윗부분 뿐만 아니라 명확히 구분 짓기 어려운 가운데 층이 생긴다. 



 이는 빛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어두운 방에 촛불하나를 켰다고 해보자. 어두운 방은 금새 환해졌으나 빛과 멀어질 수록 점차 '그라데이션(gradation)'처럼 어두워진다. '어둠'과 '밝음'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짓을 수 있을까. 이처럼 세상은 명확하게 구분짓거나 양분할 수 없는 일종의 하나덩어리다. 이 덩어리는 서로 '극'이지만, 상호 교류하고 섞이면서 양분하기도 한다. 이 엄청난 모순을 갖고 있는 우주의 법칙이 바로 '도(道)'다. 이제 다시 최초의 문장을 생각해보자. 도(道)란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는 어떤 것'을 이야기하며, '있기도하고, 없기도 하며', '생기기도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이제 도에 대해 대략적인 정의와 이름을 '임의'로 지어 불렀다. 이런 우주의 법칙을 따르자면, '정의'하거나 '시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살기 좋은 곳'이라는 정의를 예로 들어보자. 사람은 습한 곳에 살면 병이 생기지만 미꾸라지는 습한 곳에 살아야 한다. 원숭이는 나무 위에 살기를 원하지만 토끼는 그렇지 않다. 바른 곳이라는 것은 상대적이며 언제든지 움직이고 이동하는 정의하기 힘든 것이다. 맛있는 음식 또한 토끼에게는 풀이지만 호랑이에게는 고기가 된다. 사람도 각자 재각기 기준이 있으며 이는 정의하기 힘들고 모순적이며 모호하다.



 키가 170cm인 사람은 크기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고 할 수도 없다. 키 150cm인 사람 옆으로 서면 크고 190cm인 사람 옆에서는 작다. 모든 것은 정의할 수 없고 부르기도 힘들며 존재하다고 할 수도 없다. 크다는 것은 '작다'는 것이 있어야만 존재가능하다. 엄청나게 밝은 태양도 'RS퍼피스'라는 거대별에 비하면 200분의 1로 어두운 별이다. 삶은 죽음이 있어야 존재하고, 존재는 무존재가 있어야 존재하며, 밝음은 어둠이 있어야 존재한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아들'이기도 하고, '아버지'이기도 하며, '친구'이기도하고, '오빠'이기도 하다. 엄청나게 많은 이름중에는 '나'라는 것은 사라지기도 하고 생겨나기도 한다. 선하다는 것도 악함이 없다면 존재하기 어렵고, 아름다움도 추함이 없다면 정의하기 어렵다. '안다'는 것도 '모른다'가 있어야 존재한다. 이는 흔히 현대과학에서 부르는 양자역학과 굉장히 유사하다. 양자역학에서는 '존재'와 '부재'의 경계가 모호하다. 일정 확률로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정확하게 양분화하기 어려운 우주의 특성이 원자, 분자, 소립자 등의 미시 대상에 정확히 역학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이런 법칙이 '도(道)'이며 이를 알고 행하고 발현하는 능력을 덕(德)이라고 한다. 



고로 덕(德)이 있는자는 있음과 없음을 구별하지 않고,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지 않으며, 아름다움과 추함을 나누지 않는다. 선함과 악함을 구별하지 않고 사물이 갖고 있는 다양한 정체를 따로 나누지 않고 그 본질 자체로 받아들인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그렇게 되게 하며, 길고 짧음은 서로를 형태 짓고, 높고 낮음은 서로를 기울어지게 한다. 가락과 소리는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는 서로를 따른다. 높음과 낮음의 가치는 언제든 뒤집어지며 '얻음'과 잃음'도 하나의 덩어리다. 성경에서는 '금단'의 열매를 인류에게 먹지 말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창세기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선과 악을 구별짓게 됐고, 부끄러움을 알게 됐다는 내용이 나온다. 인간은 그로 인해 무언가를 구분짓는 어리석음을 통해 부끄러움을 갖게 됐다. 불교에서도 '도'를 알고 행하는 일을 '수행'이라고 하며, 득도한 상태를 해탈이라고 부르며, 이를 이른 경지를 열반이라고 한다. 세상에 '이치'와 진리'를 가르치는 수많은 종파, 학파는 사실 모두 하나를 말하고 있다. '우주', '하나'가 그렇다. 성경과 불경이라고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 '유일신을 찬양하라는 것은 이기적이다'라는 기독교 비판적 목소리도 있지만, 세상은 모두 하나의 덩어리다. 



 이는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라, 불교의 교리이기도 하고, 도교와 유교의 교리이기도 하다. 떼어내지 못하는 하나의 덩어리는 그처럼 '도'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하고, '신'으로 불려지기도 하며, '리'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이름 짓기야, 그 문화와 언어에 따라 다른 것이고 사실 명확하게 구분짓을 수 없고 정의하기 어려운 그 '우주삼라만상'을 뭐라고 부르든,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행하던 결국 우리는 모두 하나를 믿는 하나라는 사실이다. 흔히 길을 가다보면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는 이들을 간혹 만나게 된다. 그들은 과연 도를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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