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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Jan 11. 2022

[일기] 나는 본질을 챙기고 있는가_반성문


 문뜩 누군가에게 충고를 하면서 번뜩였다. 지금했던 그 충고, '나는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 내가 철저하게 믿고 있는 것은 진실인가. 영화 변호인에서 송강호 배우가 연기했던 송우석은 이런 고문경감 차동영에게 대질심문을 펼친다. 대중은 '곽동영'을 '뻔뻔함으로 무장한 악'으로 봤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는 악이 아니였다. 송우석 변호사는 곽동영 경감에게 말했다. 


 -송우석: 니는 니가 애국자 같나? 천만에. 니는 애국자가 아니고, 죄없는 선량한 국가를 병들게 하는 버러지고 군사정권의 하수일 뿐이야! 진실을 얘기해라. 그게 진짜 애국이야!"


 -차동영: 입 닥쳐, 이 빨갱이 새끼야!


차동영은 애국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든다. 이미 오래 전에 봤던 영화지만 오늘에서야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내가 본질을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대문이다. 독일계 미국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1963년 저작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제시했다. 이는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이 사실은 그저 상부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응한 평범한 공무원들의 업무였다는 사실이다. 따지고보자면, 우리가 편집되지 않은 진정한 '악'을 만날 가능성은 흔치 않다. 그런 '의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건'이 발생함으로 그것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해 '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차동영에게 애국이란,  그런 것이었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공동체를 위해 철저하게 간첩을 잡아 내겠다는 일념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가진 개인 시간을 할애하며 야근을 하던 철저하고 성실한 공무원이었을 지도 모른다. 예전에 학생운동시절 고문을 받았던 누군가가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자신을 악마처럼 고문하던 누군가가 점심식사를 하면서 자신의 딸, 중간고사 점수를 걱정하고 밀린 월세에 대해 고민한다는 말을 말이다. 그렇다. 사실 가치관의 차이는 '악'과 '선'의 모호한 경계를 만들어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중앙정보부자장 김재규에 의해 시해됐다. 이를 10.26사건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시해되고 얼마 뒤,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애국'에는 두가지 시선이 생겼다. '독재의 종말과 민주주의의 시작'이라는 시선과 '국가 안보상의 커다란 위기'라는 두가지 시선이다. 이 시선은 서로를 '악'으로 정의했다. 10.26시건 이후는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의 기능 모두가 멈춰섰다. 이것의 정상화를 위하여 비상계엄이 내려지고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3달 뒤 국가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이 11대 대통령이 된다. 전두환이다. 반면 드디어 독재정권에 대한 해방을 꿈꾸던 시민들은 신군부에 대해 퇴진을 요구하고 계엄을 철폐했다. 당시 시민들의 눈에 '신군부'는 그저 새로운 독재의 시작일 뿐이었다. 



 '전두환'은 전 대통령은 2021년 11월 23일 사망했다. 사과는 없었다. 자신이 대한민국 안보에 커다란 '선'을 했다는 믿음이다. 나는 무엇이 옳은지를 이야기하고자 이런 민감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철저하게 믿는 '선'과 '악'이 과연 '진리'에 가까운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은 '정의'를 위해 움직였다. 운동권의 반대편에서 그들을 잡아들이던 이들 또한 '정의'를 위해 움직였다. 그들이 가진 '정의'에 대한 열망의 크기는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결과론적이다. 만약 대한민국이 1945년 해방을 하지 않았다면, 존경해 마지않는 수많은 독립운동가 분들은 '테러범'으로 정의되어 '국민의 역적'으로 정의 됐을 것이다. 지금 내가 믿는 '올바름'이 결국은 '결과'에 의해서만 '옳다'고 정의되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양자역학의 이중성 원리와 같다. 이것도 정답이고 저것도 정답이다. 결국 바라보는 관찰자에 의해 어떤 형태로 정의 될 뿐, 두 가지의 중첩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어째서 나는 충고하는 나의 말이 절대선이라고 믿고 있었던 걸까. 밝음은 더 밝음 앞에 어두움일 뿐이다. 어두움은 더 어두움 앞에 밝음일 뿐이다. 결국 어두움도 밝음도 상대적으로 존재함으로 밝을 수도 있고 어두울 수도 있는 모호한 성질일 뿐이다. 오늘 많은 생각을 한다. 반성하다. 본질에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한쪽 노선을 분명하게 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가지 노선에 걸쳐 양쪽을 살피며 균형을 잡는 일이다. 반성한다.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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