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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Jan 31. 2022

[생각] 내가 파도라고는 생각하면서도 바다라는 사실은

쉽게 잊어버린다_인플루언서 글쓰기 정지중(D-3)

 '내가 파도라고는 생각하면서도 바다라는 사실은 쉽게 잊어버린다. _Jon J. Muth'

TV프로그램에 최민수 배우 님이 출연하셨다. 최면을 통해 전생 체험을 하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전생'을 믿진 않는다. 다만 무의식을 들여다본다는 것에는 믿음을 갖는다. 2013년 JTBC 프로그램 '신의한수'에 그는 최면을 통해 전생을 이야기 했다. 최면술사는 물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최민수 배우는 곰곰히 생각해보더니 답한다.

'저는... 그냥... 존재입니다.'

'그냥 제 자신입니다.'

다시 묻는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요... 바다이기도 하고요...'

'대기이기도 하구요'

'그냥 자연입니다.' 

'그저 존재 그 자체입니다.'

'나는 신입니다.'

9년이 넘은 영상 속에서 자신의 전생을 '신'이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그가 실제 전생에 '신'이었다고 믿지 않는다. 다만, 이것이 담고 있는 소름끼치는 철학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내가 어딘가를 머물고 지나가면 언제나 흔적이 남는다. 쉽게 말하면 머리카락을 흘렸을 수도 있고 각질로 분류되는 단백질일 수도 있다. 미세하게 갈려나간 손톱가루 일 수도 있고 피부에서 미세하게 분비된 분비물이나 기름, 수분일 수도 있다. 앞서 말한 피부와 모발, 손톱 등은 섬유성 구조 단백으로 우리를 이루는 구성요소 중 하나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미세하게 이런 흔적이 묻혀진다. 마치 민달팽이가 기어간 길에 끈적한 자국처럼 우리는 미세하나마 스스로의 일부를 묻히며 살아간다. 우리를 구성하던 일부는 '나'로 규정 할 수 있는가. 불의의 사고로 손이 잘려나갔다고 해보자. '손'은 '나'인가. 다리가 잘렸다고 해보자. 다리는 '나'인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나'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뇌사 상태가 되어 뇌의 활동은 정지됐고 신체만 생존해 있는 상태라고 해보자. 그것은 '나'인가. 정확하게 분류하기 힘들다. '나는 누구인가' 

'나'와 '내가 아닌 구분'은 명확하게 존재하는가. 자식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넘겨준다. 자식은 '나'인가. 나는 부모의 유전자를 넘겨 받았다. 부모는 나인가. 이처럼 타고 타고 올라가다보면 최민수 배우 님의 말이 담고 있는 의미가 파악이 된다. 나는 대기이기도 하고 바다이기도 하며, 자연이고 우주이며 존재 그 자체다. 나는 '신'이기도 하다. 나는 '성부', '성자', '성령'이며 부처이기도 하고 대화하는 상대이기도 하다. 자신을 확장하는 과정을 넓히면 지극한 이기심으로도 이타심이 발동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고,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사실상 모든 것을 알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30억 년 원핵 생물은 지구에서 최초로 생겨났다. 쉽게 말해 경멸스럽다고 유난 떠는 털 달린 벌레와 내가 크게 다르지 않다. 1672년 모로코의 아랍 술탄은 엄청나게 많은 후궁을 거느리고 있었다. 1703년 프랑스 외교관에 따르면 57세의 그는 정식 부인 4명과 500명의 후궁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자녀는 아들이 525명 딸이 343명으로 총 868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는 결과적으로 1,171명의 아이들의 아버지가 됐다.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의 아이들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그는 물레이 이스마일이다. 

 번식과 세포분열은 개체가 불어나는 생명현상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결국 뿌리와 뿌리를 찾아 떠나다보면, 우리는 결국 전체와 연결된다. 특별한 것도 아니고 '망상'의 성격도 아니다. 단지 신경쓰지 않던 진실에 가깝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루종일 하고 살 순 없다. 간혹, 커다란 문제에 직면하면 그것이 얼마나 하찮은 일인지를 깨닫기 위해 자야를 확장하는 일을 하게 된다.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보면 '비현실적인' 방향으로 종결된다. 흔히 철학자는 심오한 고민을 하다가 인생의 무념을 느끼고 자살을 할 것 같지만, 삶에 존재에 대한 고민을 했던 철학자들 중 자살한 철학자는 거의 없었다. 결국 심오하게 본질을 고민하는 것이 '인생무상'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 되려 존재의 경이로움을 갖게 하는 것이다. 쓸데없지만 그저 '이타심'을 갖기 힘들다면, 폭넓은 '이기심'을 철저하게 이용하여 행복해지고 관대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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