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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Feb 22. 2022

[생각] 인생은 일종의 놀이다.

놀이에는 규칙이 있으며,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 진정한 재미다.

 "삶은 하나의 아름다운 놀이라고 생각해. 놀이에는 항상 규칙이 있지만 진정한 재미는 그 규칙을 위반하는 것에서 나와" -소설, <어느날, 너의 심장이 멈출거라 말했다.> 中 

 인생은 고귀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정의하는 것들은 많지만, 그런 건 없다. 인생이란 그저 '태어나버림'과 '죽어버림' 사이의 공백을 채워 넣는 시간에 불과하다. 이땅에 태어난 분명한 이유나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사명을 하달 받고 '생명'을 부여 받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그들 답지않은 이상한 유추를 했는데, 지난 5000년 간, 이땅에 태어나고 죽은 인간의 수가 1,082억 명 이라는 사실이다. 즉, 시간이라는 관념을 제외하면 태어나고 죽은 '인간' 중, 지금 살아 있는 인간은 대략 7% 정도라는 의미다. 나머지 93%의 인간은 이미 태어남과 죽음을 경험했으며,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삶'과 '죽음'이라는 것에서 따지고보자면, '삶'보다 '죽음'이 흔한 일이다. 삶은 전체에서 7%에 해당하지만, 죽음은 93%다. '죽음'이라는 현상보다 '삶'이라는 현상이 훨씬 희귀한 일이며, 그러기에 짧게 스쳐지나가는 '삶'에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다. 죽은 이들의 일부는 다음 후대에 무언가 남겼다. 다만. 정작 스스로는 사라졌다. '내'가 없는 세상에 '내가 남긴 것'이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들은 죽고 스스로를 이루던 단백질 분자는 서서히 분해되어 아미노산으로 나눠졌다. 열역학 제 2법칙에 따라 엔트로피는 꾸준하게 증가하여 질서없이 흩어져 버린다. 콜라겐 단백질 1종에는 1055개의 아미노산이 정확히 배열되어 있어야 한다. 엄청난 확률로 정배열되어 있는 것들은 순서없이 흩어진다. 

 삶을 사는 방법이란 따로 없다.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삶이나 지극히 이기적인 삶이나 모두 삶의 한 조각들이다. 위대한 업적을 이룬 누군가나, 추악한 범죄자나 모두가 시간을 만나고 '열역학 법칙'을 만나 원자 단위로 해체 되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다시 어떤 형태로 재조립되어 다른 자연의 형태로 생성된다. 죽은 뒤에 무언가로 골라 태어난다는 '내세관'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원자의 갯수가 레고 블록과 같이 어떻게 조립되느냐에 따라 '이것이 되고, 저것이 되는 생물학'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삶에 '운명론'을 갖다 붙이는 순간, 인생의 의미는 희안하게 해석된다. 인간의 운명을 알아보는 데는 4가지 요소와 8글자가 있다. 4주는 4가지 기둥을 뜻한다. 태어난 연도, 월, 일, 시간은 기둥이 되어 그사람의 운명 뼈대가 된다. 또한 여기에 <갑, 을(나무, 푸른색), 병, 정(불, 빨간색), 무, 기(흙, 노란색), 경, 신,(금, 흰색) 임, 계(물, 검은색)>의 10천 간과 <자(쥐), 축(소), 인(호랑이), 묘(토끼). 진(용), 사(뱀), 오(말), 미(양), 신(원숭이), 유(닭), 술(개), 해(돼지)>의 12지지를 각각 두 글자씩 배열하여 8글자를 만든다. 가령 2022년을 의미하는 '임인(壬寅)'을 보자면 '앞서 말한, '임(물, 검은색)'과 인(호랑이)'를 뜻하여 검은 호랑이의 뜻이 생성된다. 거기에는 '물'의 속성도 추가해서 해석해 볼 수 있다. 자연에는 '물'과 '불' 처럼 대비되는 속성이 존재하고 '나무'와 '물'처럼 너무나 잘 맞는 속성도 존재한다. 난시, 년, 월이 오늘과 얼마나 대비되는지를 살펴보면 오늘이 운이 좋은 날인지, 아닌지를 살펴 볼 수 있다. 이것이 '사주팔자'다.

 그렇자면 내가 난시 속성이 '불'인데, 2022년의 속성이 '물'이라면, 나는 올해하는 일마다 안 될 것인가? 잘 모르겠다. 다만, 모든지 즐기면 된다고 여긴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보시던 '화투점'도 꽤 정확하다고 할머니는 믿으셨다. 이는 '믿음'의 영역이다. 그것이 맞다, 아니다.를 따지고 싶진 않다. 다만 무언가 하나를 믿기에는 선택 옵션이 너무나 다양하다. 종교와 철학을 넘나들며 생과 사에 대한 너무나 만은 관념이 꾸준하게 인간 세계에 들락거리면서 나는 넷플릭스 '홈' 화면에서 영화를 고르다 잠들어버린 어제처럼 선택장애를 겪는다. 어느하나 선택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의 철학은 분명하다. 인생에서 내가 하는 일마다 '모두 안되던', 내가 하는 일마다 '모두 되던' 나는 2,000의 화요일도 경험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내가 하려는 일이 모두 안되더라도 어차피 사라질 것이라면 내가 죽은 뒤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발악할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즐거워야 한다. 이런 즐거움은 책과 같이 인생이 설정한 규칙을 깨는 것에서 나온다. 인생에는 일종에 규칙이 있다. 가령 이렇다. 초등학교를 들어가면 중학교를 가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를 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을 가며,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을 한다. 이 뒤에도 결혼과 출산을 하고 나와 같은 과정을 자녀에게 물려준다. 도돌이표하여 나의 자녀의 모습을 나와 같이 만들고 나는 부모의 삶을 닮아간다. 이것이 삶의 규칙이다. 이런 규칙은 인생 세세하게 살펴보면 상당히 많다. 나는 개인적으로 규칙을 깨는 것을 좋아한다. 내성적인 나의 성격이 말하는 '넌 틀림없이 이런 것은 못할거야!'를 깨버리고 난데없는 독특한 행동을 한다. 이것이 운명을 개척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유명 연예기획사 오디션을 본다거나, 책을 내거나, 수 십, 수 백 명 앞에서 강연을 하거나 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 나는 묻는다. '너는 이거 못할거야!' 그렇다면, 나는 이 규칙을 깨버린다. 그리고 희열을 느낀다. 수출박람회에서 수입업자를 겨우 찾고 코트라를 통해 바이어를 찾는 일이 아니라, 구글을 통해 직접 전화번호와 이메일을 확인하고 컨택하는 방식으로 수출하는 일을 해 버린다. 규칙이 깨지면 재밌다. 컴퓨터 게임도 나는 개발자가 만들어낸 규칙에 따르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다르게 할까를 고민한다. 남들은 개발자가 만들어 낸 규칙을 위해 움직이지만 나의 재미는 다른 곳에 있다. 상대를 죽어야 '이기는 게임'에서 나는 항상 '지지'만 반대로, 항상 게임을 즐긴다.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게임의 재미 요소가 '승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 내가 이상한 것은 맞다. 하지만 내가 이상하다는 것을 내가 모른다면, 내가 이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날은 고춧가루가 앞니에 시뻘겋게 묻어 있는 날이 있다. 내가 그것을 확인하자 얼굴이 불거진다. 다만, 수많은 비슷한 실수 중에 내가 확인한 것은 아마 극 일부일 것이다. 고로 내가 확인하면 수치심이 들고, 내가 확인하지 않으면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불행한 인생이라고 하더라도 괜찮다. 내가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불행한 인생이 아니다. 내가 가난하다고 해도 괜찮다. 내가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가난한 인생이 아니다. 결국 인생이란 스스로 가장 행복한 길을 택하는 것이다. 어떠한 위대한 업적이나 기록도 내가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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