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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Feb 26. 2022

[인문] 시간의 역사에 대해

역사 속의 시간 시간속의 역사

세르반데스와 셰익스피어는 같은 날에 죽었나? 윌리엄 셰익피스피어는 1564년 4월 26일 출생하여 1616년 4월 23일 사망했다. 소설 '돈 키오테'의 저자인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또한 1547년 9월 29일 출생하여 1616년 4월 23일 사망했다. 얼핏 보기에 대 문호의 사망일이 우연찮게 1616년 4월 23일이다. 이런 기가 막힌 우연이 어딨을까 싶지만, 그렇지 않다. 실제로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보다 열흘 정도 더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둘이 사망일자가 같은 것일까. 그것은 셰익스피어는 율리우스력을 따랐고, 세르반테스는 그레고리력을 따랐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 같지만 이처럼 절대적인 힘을 갖게 된 것을 얼마 전이다. 2000년 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율리우스력을 만들었다. 그리고 1600년이 지나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이 달력을 고쳐 지금 세계의 달력인 그레고리력을 사용했다. 인류가 같은 달력을 사용하고 공유한지는 100년도 되지 않았다. 영국은 1752년 처음 그레고리력을 사용했고 스웨덴은 1753년 사용했다. 한국은 1896년, 일본이 1873년에 채택했고, 러시아는 1918년, 그리스가 1924년에 각각 채택했다. 생각보다 인류는 같은 날자를 쇤지 오래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인류가 시간을 바라보던 관점은 더 극명하게 달라진다.

 전통적으로 동양은 순환적 시간 관념을 가졌다. '윤회' 사상과 연결된 이런 순환적 시간관념에 비해 이스라엘의 유대-기독교인들은 '직선적 시간관'을 가졌다. 즉, 동양에서는 시간이란 지난듯 하지만 다시 돌아오는 관념인 반면, 서양에서는 화설처럼 일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이런 관념의 차이는 사실 둘 다 일리가 있다. 시간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수레바퀴는 회전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순환과 직선의 의미를 모두 갖고 있는 '수레바퀴'처럼 시간은 순환하는 듯 하면서 앞으로 나가아고, 앞으로 나가가기만 하는 듯 하지만, 순환하기도 한다. 이처럼 관념 속에 존재하는 시간이란 문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다만, 절대적인 '시간'은 어느 문화권에 있던 어느 곳에 있던 일정하다. 우리는 이처럼 절대성을 가진 '시간'을 '공간'과 연결 시켰다. 가령 '1광년'이라는 거리는 빛이 1년 동안 이동한 거리를 뜻하는 단위가 됐다. 괘종시계는 추가 흔들리며 이동하는 '공간'을 '시간'으로 변환시켜 보여주는 장치였다. 물시계의 원리도 '위치'와'공간'을 '시간'으로 연결시키는 장치다. 1m라는 길이 또한 기준이 몇 차례 바뀌긴 했지만, 지금은 '시간'을 이용하여 절대성을 가졌다. 1983년 국제도량형위원회(CIPM)는 빛이 진공상태에서 2억997만2458분의 1초동안 이동한 거리라고 규정했다. 이처럼 '시간'이 '공간'과 연결되고 절대성을 갖게 되면서 이는 '수학'과 '과학'의 영역 안으로도 들어온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통해 시간과 공간이 결합된 '시공간 개념'을 들었다. 이 관념은 사실 '동양적 사고'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동양에서 말하는 '우주'라는 개념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우주는 공간을 이야기 하는 '우(宇)'와 시간을 나타내는 '주(宙)'가 하나의 단어로 사용된 단어다. 

 그저 태어나보니 모두가 사용하고 있던, '초', '분', '시', '일', '주', '월', '년,' 세기'의 개념은 태초에 자연에 존재할 것 같지만 실제로 인간은 이 시간을 길들이는데 엄청나게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또한 상호 간의 관념을 연결시켜 하나로 통일하는 거대한 이 작업은 '인류'를 진일보 시켰다. 다만, 이처럼 우리가 시간을 갖게 되면서 갖게 된 단점도 많다. 북에서 남으로 탈북한 새터민들의 경우, 남한의 노동강도를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시간 사회전반적으로 적용되면서 아이러니하게 우리는 더욱 '구속'받았다. 시간이 없던 시절 인간의 대부분은 배가 고플 때 밥을 먹고, 충분히 자고 일어나며, 일할만큼 일하는 자유를 얻었다. 우리가 시간을 갖게 되면서 아이러니하게 '시간이 없는 상황'들이 벌어지면서, 이제 인간은 '여유'있는 삶을 동경하는 지경이 됐다. 2022년 새로 출판한 나의 새로운 책, '유대인의 하루는 저녁 6시에 시작된다'에서도 언급했지만, 시간이란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정의하기 나름이다. 그저 아침 기상 시간을 빠르게 당기는 일이 '부지런함'과 '성공의 열쇠'라고 여겨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시간에 대해 구속받는다. 다만 시간은 '사회'가 개인을 통합하고 구속하기 위한 수단이다. 우리는 기계가 억지로 깨워주는 아침을 맞이한다. 애초 자연에서 햇볕이 만들어낸 자연광이나 생명의 위협이 느껴지는 위기의 상황이 아니라면, 생물이 잠에서 부자연스럽게 깨어나는 상황은 많지 않다. 누구에게나 삶에 적합한 생체 리듬이 존재한다. 사막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더운 한낮을 피하기 위해 저녁 시간을 현명하게 사용했고 농업국가의 국민들은 역시 대낮을 피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먼저 하루를 시작하고 낮에 휴식을 취하는 하루를 살았다.

 선발제인 후발제어인(先發制人 後發制於人), 한시에는 '선수를 잡으면 남을 제압할 수 있고, 후수를 잡으면 남에게 제압 당한다'는 말이 있다. 시간차에 따라 제압하는 사람과 제압당하는 사람이 존재한다. 사회진화론적으로 근대에는 이처럼 시간을 잘 이용하는 사람이 선수를 잡고 문명국이 되었으며, 시간을 잘 이용하지 않는 이들은 야만이나 미개 문명으로 분류했다. 이는 시간을 '잘 이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지, 남들보다 먼저 일어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황제의 재위년을 이용해 시간을 사용하던 고대에는 'oo황제 oo년'를 사용했다. 이런 시간 표기법은 '미래'를 표현할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은 시간을 이용했지만, 시간은 다시 인간을 길들이며 마치 자연에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으로 여기게 했다. 인간은 땅의 작물을 통해 길러졌다. 이 작물은 '하늘'의 영향을 받았고 하늘을 알기 위해 인간은 해가 뜨고 지는, 달이 이동하는 거리와 시간을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시간이라는 관념은 이제 전 세계인에게 적용되어 획일적으로 밥을 먹게 하고, 획일적으로 일을하며 획일적으로 살도록 만들었다.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칼'은 요리도구가 되거나, 흉기가 되거나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시간'이 어떤 것이라고 정의 내리기는 스스로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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