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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Mar 05. 2022

[읽을책] 물들이다 그리고 스며들다

 구멍난 현무암 위에 '연분홍' 봉선화 꽃 잎에, 연초록 봉선화 잎을 내려 놓는다. 주먹만한 현무함을 들어다 봉선화 꽃잎을 짓이긴다. 돌가루가 투박하게 들어간 백반 섞은 꽃잎 반죽을 손톱 위에 얹는다. 연초록 잎사귀로 손톱을 감싸고 하얀 재봉실로 손톱을 돌돌 감는다. 이제 해야 할 일은 '기다리는 일'이다. 물들이기 위해선 스며들기를 기다려야 한다. 스며들기 위해선 시간을 들여야 한다. 시간을 들이면 스며들고 스며들면 물든다. 서로 닮아간다는 것은 시간을 들여 스며들고 물들었다는 것을 말한다. 빈 잔에 따뜻한 차를 붓는다. 빈 잔의 온도가 차와 같이 서서히 차오른다. 잔이 뜨뜻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의 온도가 잔에 옮겨온다. 잔을 잡고 있는 손이 뜨뜻해진다. 차는 잔에 스며들고 다시 들고 있는 손바닥으로 전해진다. 섞이는 과정은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맛있는 재료는 각자 그들만의 개성이 있지만 서로 섞여 완전한 하나의 음식이 된다. 한 번 섞여 '음식'이 되어버린 '재료'는 다시 분리해 낸다해도 예전 같지 않다. 어딘가 묻어 있고 어딘가 스며들어 있고 어딘가 닮아 있다. 과거의 향내가 묻어있다. 분리된다는 것은 완전하게 떨어진 척해도 결국 상대의 무언가를 짊어지는 것이다. '상실'이라는 것은 내것을 내어주고 상대의 것을 가진자들이 상대를 잃으며 '내것'도 함께 잃는 것이다. 시간을 들이며 닮아 갈수록 그것을 더 많이 떠올릴수록 나는 그것과 닮아간다. 얼마나 그것과 함께하느냐, 얼마나 그것에 나의 시간을 쏟았느냐는 섞이고 물들고 스며드는 일이다. 어린왕자는 여우에게 말했다.

 '언제나 같은 시간에 오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가령 당신이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벌써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에요.'


 느닺없이 찾아오는 '기다림' 없는 시간은 '따끔'하는 정전기처럼 순식간에 불꽃을 튀며 반짝이고 이내 사라져 버린다. 여운보다 자극이 가득한 만남은 강렬하지만, 스며들지 못한다. 은은하게 달궈진 태평양의 바다는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되고 강이 되고 다시 바다가 되지만, 강력하게 내리치는 번갯불은 큰 변화를 만들지 못한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상실'에 대해 인간은 다섯단계를 밟는다고 했다. 첫째로 '현실부정', 둘째로 '분노', 셋째로 '인정', 넷째로 '우울', 다섯째로 '수용'이다. 삶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얻기도 하지만, 다시 오래된 것을 잃기도 한다. 누군가는 다섯번째의 단계를 빠르게 치고 달려 모든 것에 초탈해지길 바란다. 이 단계를 번갯불처럼 지나보내고 싶지만, 덜어내지 못한 상대의 흔적은 나에게 남아 있다. 상대에게 넘어간 나의 흔적을 잃고 나에게 남은 상대의 흔적을 묻히고 산다. 인생이 다변적이다보니 정든 곳을 등지는 일이 많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의 집에서 등졌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자취하던 방을 등졌다. 군대를 전역하면서 2년 간, 살았던 장소를 등지고 유학을 마치고서 오래 거주하던 도시를 등졌다. 새로운 곳을 향하려면 필연적으로 익숙한 것을 떨쳐 내야했다. 지나치게 감성적일 수도 있지만, 모든 걸 정리하고 텅 빈 공간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면, 그곳에서 있던, 작고 사소한 기억들이 모두 묻어 있는 공기에 못내 먹먹했다. 그곳에 있던 공기에 공간에는 내가 묻혔던 흔적들이 가득했다. 그것에서 받았던 스트레스와 슬픔, 고통, 기쁨, 즐거움이 마치 원자 단위로 촘촘하게 박혀 있는 듯 했다.


 그것을 등지가 한참을 먹먹하게 생각하고 살다보면, 어느덧 그것들은 '감정'이 휘발된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좋았던 기억과 나빴던 기억에서 '감정'이 증발하고나자, 그것들이 모두 은은하게 내 일부였음을 알게 된다. 그 일부는 '좋다'도 아니고, '나쁘다'도 아닌 '소중하다'로 기억된다. 오래된 것을 버리지 못하는 성격은 앞에 설명한 다섯 단계를 느릿 느릿하게 가게 만들었다. 겨우 한 단계 넘었나 봤더니, 다시금 떨어져와 아래로 시작한다. 다섯 단계 중 어느 한 단계에서 이미 익숙함을 느꼈는지 오랫동안 머물기를 습관처럼 한다. 다시금 느낀다. 고통의 시간에 머무는 시간이 길수록 나는 고통과 닮아져간다. 주변에 즐거운 일들이 많아지길 바라면서, 나를 익어가게 만드는 서서히 끓는 실험관 속 개구리처럼 느껴지지 않는 변화에 화상을 입는다. 어떤 날은 냉장고 문을 열고 시원한 맥주 한 캔 꺼내고 넘어가지 않는 목구멍 멍울을 꿀떡하고 삼켜본다. 따끔거리는 맥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커다란 알맹이가 삼켜지는 듯 하다가 그것은 몸속으로 들어가 소화되고 온몸 구석 구석으로 퍼져나간다. 유학하던 시기, 사람들을 만나면 가장 먼저 '비자만료일'을 묻곤 했다. 오래 머물던 나와 달리, 내가 인연짓는 사람들은 얼마의 시간을 보내고 비자 만료일에 맞춰 한국으로 떠났다. 내가 시간과 감정을 쏟았던 이들이 매번 예정된 시간에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자, 나는 그들의 예정된 시간을 언제나 확인했다. 언제까지 함께 할 수 있는지가 확인이 되면, 그들에게 시간과 감정을 적당한 만큼씩 덜어 주고는 했다. 누구를 만나고 헤어지든, 이별이란 같은 내가 쏟아낸 어떤 것 만큼의 상실감을 갖게 한다. 그것이 크면 클수록 내가 무너지는 듯하다. 쓰러질 듯한 두 다리를 겨우 버티고 서있노라면 그 위로 수 천 톤의 기억들이 첩첩히 쌓인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여겨질 때 쯤, 눈을 떠보면 현실에서 식은 땀을 흘리며 악몽을 꿨다고 되새긴다. 그렇다. 어쩌면 잠에 들고 잠에서 깨는 그 과정에서의 감정의 변화를 나는 현실이라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깨고나면 여운이 가득한 꿈이지만, 어쩌면 나는 따뜻한 방, 편안한 침대 속에서 아늑하게 '악몽'을 꾸고 있는 가장 안전한 감정 여행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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