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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Mar 15. 2022

[정치] '충격', '특종', '단독' 선동은 어떻게

내러티브 뉴스 독후감

 글의 제목에 '특종', '단독'이라는 단어에 흘깃하여 이 페이지를 열어 봤다면, 우리는 언론을 '욕'할 이유 하나가 사라진 셈이다. 자본주의에서 선택받지 못한 상품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어렵게 말할 것도 없다. 자연에서 선택받지 못한 생물 또한 사라진다. 이것은 우리를 있도록 한 '진화론'의 '자연선택설'이다. 자본주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선택받지 못한 상품과 서비스는 사라진다. 환경에 선택받는 것은 고로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은 것들이야 말로 '우성인자'다. 우성인자는 유전된다. 다음 환경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면, 살아남은 우성인자 중, 더 특화된 종이 살아남는다. 그렇게 환경에 따라, 진화는 일반향으로 흘러가는 것 처럼 보인다. 공룡이 지구를 점령했던 중생대는 대략 18억6000만년이다. 그중 공룡이 지구를 지배했다고 보여지는 기간은 1억 5천만 년이다. 인류 탄생은 지금으로부터 2~400만년이다. 그 많던 공룡들은 다 사라지고 지금은 털없는 원숭이로 보여지는 '사피엔스' 종이 지구를 바글 바글 뒤덮고 있다. 어째서 그때는 공룡이 맞고, 지금은 인류가 맞는가. 지구의 산소 농도는 주기적으로 변한다. 낮을 때는 12%이고 높을 때는 35%다. 쉽게 산소는 0.5%의 변화만 생기더라도 숨쉬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꾸준하게 환경을 변화시키며 대기중의 산소 농도를 바꿔왔다. 여기서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과 적응하지 못하는 생물이 나눠졌다. 고생대 캄브리아에는 산소농도가 12%까지 줄어든다. 여기에 적응하지 못한 대부분의 생물종은 멸종했고 곤충과 같은 생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시 데본기에는 산소가 급증하며 해양 동식물이 바다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러다 공룡이 살던 중생대의 산소의 농도는 다시 15%로 추락한다. 이렇게 대기와 해양 속의 산소의 농도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몸집이 큰 동식물이 유리하다가, 다시 몸집이 작은 동식물이 유리하게 되다.

 한국 기자를 비꼬는 말로 '기레기'라는 용어가 인터넷에 등장했다. '기레기'는 '특종', '단독'과 같은 자극적인 기사를 만들어내고 제목과 상관없는 주제를 뽑아, 클릭수를 높이기도 했다. 중립적이지 않은 내용을 통해, 정치와 경제에 간접적인 간섭을 하기도 하고 모호한 용어 사용을 통해서 본질을 흐리기도 했다. 이것은 과연 그들의 잘못인가. CNN과 CBS에서 많은 탐사보도를 하고 여러 수상 경력을 가진 미국의 언론인 '셰릴 앳키슨'는 '내러티브 뉴스(책)'에서 '뉴스'의 문제를 꼬집는다. 특별히 '한국언론의 문제점'이라고 찝어내지 않았음에도 한국 독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것이다. 우리가 '기레기'라고 비웃고 조롱하던 언론의 문제는 '한국 언론'만의 문제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언론이 가진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다. 환경에 의해 생존을 받아야 생존하는 '진화론'적인 입장에서 '언론'은 환경에 적합하게 잘 성장해왔다. 여기에는 언제나 문제가 발생한다. 어째서, '공룡이 멸종했는가.'에 '공룡의 문제'를 끄집어 낸다는 것의 상당희 의미가 없다. 일반적으로 대기 중 산소의 농도는 21%다. 1.5%의 산소 농가 줄어 19.5%가 되면, 흔히 말하는 '산소부족' 상태가 된다. 집중력이 저하되고, 구토와 두통등의 저산소증세가 나타난다. 우리와 공룡이 같은 환경에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를 알 수 있다. 영화 '쥬라기공원'에서 인류와 공룡이 함께 생존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한다. 둘 중 하나는 21%의 농도에, 다른 하나는 35%의 산소 농도에 숨을 쉬는데, 어떻게 공존 할 수 있는가. 환경은 그토록 무섭다. 

 흔히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이라는 말을 한다. 보수언론이라면 보통 분류하기를 '조중동', 즉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를 일컫고, 진보 언론이라면,한겨례, 경향신문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에서만 존재할 것 같은 언론의 정치편향성은 사실 어느나라에나 존재한다. 이는 언론사 창업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구독자의 성향의 문제다. 얼마 전 읽었던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의 '모두 거짓말을 한다'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었다. 언론사가 일방적인 정치 편향 보도를 하는 것도 문제일 수 있으나, 구독자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진화되어 왔다는 시각이다. 즉, 언론 독자적인 문제를 꼬집기에 그 것이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는 환경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문제일 수도 있다. 환경은 그렇다. '내러티브(narrative)'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다큐멘터리에서 자주 사용하는 '나래이션'과 어원을 함께 하고 있는 단어다. 언론은 정보를 전달함에 있어 단어 선정을 한다. 여기에는 의도치 않던, 의도를 했던 본질을 흐리게 하는 용어가 섞여 쓰인다. 진실된 정보와 사실을 전달함에 있어서도 글쓴이의 의도는 분명하게 들어간다. 즉, '기독교 국가의 1인당 gdp가 상대적으로 높다'라는 황당한 기사를 어린 시절 접했던 적이 있다. 이 기사에는 거짓은 없다. 실제 1인당 gdp로 봤을 때, 기독교국가의 gdp가 높긴 하다. 팩트를 전제로 한 기사에는 쉽게 생각해보면 '의도'를 유추해 볼만한 '내러티브'가 숨겨져 있다. 선진국일수록 식배 비중이 낮고, 고소득일수록 '식비 비중'이 높다는 엥겔의 법칙도 팩트임에도 불구하고 쓰기에 따라 그 의도가 불순하게 쓰여지기도 한다. 

도서는 실제 미국 현대 정치의 기본 배경 지식이 없으면 자칫 어려울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그밖에 미투 운동 등 미국 현대 사회의 이슈들을 언론이 어떻게 해석하고 보도했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히 지난 트럼프 힐러리의 미국 대선과 이후 트럼프를 향한 언론의 내러티브에 대한 서술이 많다. 언론은 중립적이어야 한다. 이론적으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환경이란 바로 그 글을 읽고 접하는 독자들을 의미한다. 지금도 댓글하나 달리지 않는 좋은 기사는 얼마든지 있다. 다만, '기레기'라는 욕이 달리는 인기 '기사'에는 어김없이 엄청난 조회수가 따른다. 우리는 그런 안좋은 기사를 욕하지만 결국 그 제목에 이끌려 그것들을 선택한다. 환경에 적합한 우성인자들은 더 환경에 맞게 성장하는 법이다. 의사의 소명은 '돈'이 아니라, '환자의 생명'이다. 그러나 어떤 의사도 '돈을 받지 않고 진료하겠다'고 개업하는 경우는 없다. 의사에게 일정의 의료비용을 지급하면서 의사의 가치관에 대한 '신뢰'는 의사에게 맡긴다. 이것은 '언론'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보여지기도 한다. 의사가 히포크라테스 선서할 때, 그들은,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고, 동업자를 형제처럼 생각하며, 인종, 종교, 국적, 정파, 사회적지위를 초월하기로 한다. 또한 자신의 위협에서도 그 지식을 인도적으로 사용하기로 선언한다. 다만, 이는 현실적으로 적정 타협점에서 가치관과 현실성의 중간을 택하도록한다. 더 좋은 언론이 되기 위해선, 그들에게 채찍질을 할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환경을 그들에게 제공해야한다. 그리고 이 우리 모두는 그 환경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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