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인환 Mar 22. 2022

[인문] 혼자 놀기의 철학_고독한 놀거리 마스터

 팝 스타 마돈나가 하루 일과 중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일까.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그녀는 하루 일과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 머리 감으면서 소변을 볼 때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 인생은 고귀하고 대단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태어나버림과 죽어버림' 그 사이의 공백을 채워 넣는 일일 뿐이다. 인생의 목적은 사소한 찰라와 찰라의 순간을 즐기는 것 그 뿐이다. 예전 외국의 한 프로그램에서 돈다발 위에 손을 올리고 손만 떼지 않으면 10억을 주는 컨텐츠의 방송을 했던 적이 있다. 게임의 방식은 단순하다. 그저 돈다발 위에 손을 올리고 오랫동안 떼지 않으면 된다. 이 중 상금을 가지고 간 이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배가 고파서' 혹은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라는 사소한 이유로 10억의 상금 위에 손을 뗐다. 그렇다. 우리는 사실 대단한 것을 하고자 하는 듯 하지만, 사소한 것에 더 큰 행복감을 느낀다. 상금이 100억이라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밥을 먹거나, 물을 마시기 위해, 손을 뗄 것이고 누군가는 소변을 보기 위해 손을 뗄 것이다. 10억을 포기하고 방송국 화장실로 달려가 10억 짜리 소변을 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사실 그렇다. 대단한 일은 웬만해서는 잘 없다. 우리가 광활한 우주의 은하라도 하나 창조 하는게 아니라면 말이다. 진정한 행복은 거의 대부분 사소한 것에 있다. 우리는 대통령이 되거나, 재벌이 되거나 그저 시골에서 작은 텃밭을 가꾸며 사는 농부의 삶을 살지라도 모두 별거 없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어느날 갑자기 심장마비가 생길 수도 있고 교통사고로 생명을 잃을 지도 모른다. 인생에 자체에 커다란 부담감을 느끼면 즐겨야 할 인생에 아무런 오락도 즐기지 못한다. '존 A. 쉐드'는 나에게 꽤 공감되는 명언을 남겼는데, "A ship in harbor is safe, but that is not what ships are built for.(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그러나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가 아니다.)"라고 했다. 인생은 언제나 '골'과 '산'이 굽이치는 파도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언제나 기쁨이 있고 슬픔이 있다. 붓다 인간의 고통과 번뇌가 '인생의 골'에서 발생함을 알았다. 고로 그는 이를 없애기 위해, 해탈을 이야기 하곤 했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수행자의 삶을 통해 삶의 출렁임을 줄였다. 고통이 사라졌으나 이 방법은 인생의 쾌락도 함께 지워내야 했다. 인생은 언제나 즐거움을 추구해야한다. '고독한 놀거리 마스터'의 저자 이종구 작가의 철학이 나의 철학과 많이 닮아 있다. 책을 한 권 읽으면서 몇 번을 긍정적인 의미로 내려놓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실행하고 싶은 욕구가 머릿속으로 침투했다. 우리는 밋밋한 일상을 타개하기 위해, 돈을 내고 공포의 상황을 구매한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상황을 인위적으로 만들고, 살해되거나 고통 받거나 슬픈 상황을 스크린을 통해 들여다본다. 있을 필요도 없는 부정적인 감정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어 오락으로 즐긴다. 결국 번뇌와 고통도 일종의 놀이로 여길 수 있다. 누구나 안전장치가 되어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상황을 즐길 수 있다. '안전장치'라는 것은 무엇일가. 깊게 따져들면, 그 조차 무의미 하다. 우리가 불안해 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생존'의 위협에 대한 공포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위협을 영생토록 이겨낸 이는 없었다. 어차피 맞아들여야 하는 것이 '죽음'이다. 피할 수 없는 소나기는 그냥 맞야야 한다. 어치파 젖을 걸 알면서 피하려고 허둥될 필요가 있나. 대부분은 모든 상황은 즐길 수 있다. 좋은 일이 있다고 기뻐할 필요도, 나쁜 일이 있다고 슬퍼할 필요도 없다. 그저 담담하게 인생의 파도에 몸을 맡기며 그 출렁임을 즐기면 된다. 개인 사무실 겸 서재로도 사용하고 있는 '학원에는 엄청나게 큰 '빈 강의실'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 강의실 한 쪽 벽면을 비워 두었다. 그 벽 쪽으로 '빔 프로젝트'를 쏘고 웅장한 스피커를 갖다 놓으면, 코로나 시기에도 거대한 개인 영화관을 가질 수 있다. 학원 중앙에는 웬만한 소형 서점 규모의 책이 정리되 있다. 편의점에 파는 싸구려 수제 맥주를 갖다가 영화를 즐긴다. 화면에서 벌어지는 공포스러운 장면을 편안한 자세로 즐긴다.

 화면이나 페이지에서 재생되는 내용은 잔혹하고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편안하게 맥주를 즐기며 여가를 갖는다. '명상'을 즐기는 이들은 이처럼, '영사기가 재생하는 고통' 현실의 나에게 미치지 않는다. 그것을 깨닳으면 영화나 소설을 즐길 수 있다. 불교에서도 제3의 시선의 습관은 삶의 번뇌를 줄인다고 한다. 즉, 드라마의 주인공이야 죽던 말던 지켜보는 제3는 2시간 보장된 영화가 끝난 뒤, 자리를 정리한 하고 편안하게 침대 위에서 잠을 잔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감정을 객관화 하는 것이야 말로 인생의 번뇌를 벗어나는 방법이다. 모든 훈련은 사실상 '혼자 놀기'에서 터득하는 일종의 삶의 본질이다. 중요한 사업에서 실패를 하거나, 시험에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저 그 상황을 지켜보는 것으로 즐김을 하면 그것으로 됐다. 고독하고 우아하게 노는 방법은 사실 여럿이 노는 것도 있겠지만, 혼자 노는 것이다. 혼자 놀기는 충분한 사색의 시간을 주고, 객관성을 만들도록 돕는다. 누구보다 자신을 관찰할 시간을 많이 만들어준다. 살다보면 화가 난 상사의 한숨 소리나 발자국 소리에 귀를 쫑긋하면서, 정작 자신이 내뱉고 들이 쉬는 들숨과 날숨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나는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은지 혹은 어떤 습관이 있고 어떤 것을 좋아하며,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제대로 파악도 못한 주제에, 남에 대한 신경을 곤두 세우기 마련이다. 혼자 놀기는 그 누구보다 자신을 잘 관찰할 수 있도록 돕는다. 만 스물이 되고 해외에서 근 10년을 혼자 살았다. 혼자 놀기의 달인으로 살다보니, 나혼자만의 문화가 만들어지곤 한다. 이것은 말 그대로 문화이며, 시간이 지나면서 가장 나에게 적합하게 발달해져 간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군대 혹한기 훈련에서 일주일 간 씻지못해, 몸과 머리, 얼굴에서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을 때, 위장크림을 얼굴에 덕지 덕지 바르고 물티슈로 그것을 대충 닦아 냈을 때, 그 고통이 극한이 되고 찾아 온 혹한기 마지막날 샤워는 그 무엇보다 소중했다. 마찬가지로 극한의 운동을 하고 100번의 스쿼트를 하고 부들 부들 떨리는 다리의 힘을 풀어 바닥에 털썩 주져 앉았을 때도, 그렇다. 별거 아닌 아주 찰라의 순간도 우리는 그 무엇보다 값진 행복감을 느낀다. 결국 고통 뒤에 찾아오는 '별거 아님'에 행복을 느낀다는 점에서 사실, '고통'이 감춰 놓은 '행복'의 달콤함을 기대하는 것도 인생의 재미일 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는 아무래도 나와 생각하는 방식이 비슷한 것 같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으나, 느닺없이 철학과 인문학으로 가슴속 부터 후벼 들어가는 문장들로 앉은 자리에서 모두 완독해 버린 책이다. 그렇다. 삶은 생각보다 별거 없다. 그냥 하나의 놀이일 뿐이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면 의미가 생기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의미가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의미를 부여하고 부여하지 않고 또한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싸구려 편의점 우동을 사먹어도 귓속에서 '일본풍' 음악이 흘러나오면 음식의 가치는 배로 올라간다. 이어폰은 주변이 어떻든 어떤 상황에서도 사방을 뮤직비디오로 만들어낸다. 이것은 혼자만 즐길 수 있는 감상이다. 너무 진중하게 세상 만사를 맞이하며 흰머리와 주름살을 늘려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언제나 긍정적이게 모든 것은 일종의 게임이고 오락일 뿐이며, 이 인생이라는 놀이를 최대한 즐기는 것이 내 삶의 유일한 목적이자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역사] 일상에서 확인하는 인문학과 역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