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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Mar 22. 2022

[웹소설] 전남편을 죽여주세요 (1화)

정답이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최악의 오답을 피하는 것이다.


별거 아니라고 현수는 그렇게 다짐하며 일상을 이었다. 


자신의 직업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남들과 특별하게 다를 것 없는 일상을 산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그러던 얼마 전, 그에게 새로운 의뢰가 하나 들어왔다.


"전 남편을 살해하는데 도와주셔야겠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젊었고 슬픔에 차 있었다.


여느 의뢰인들과 다르지 않고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공포와 호기심, 슬픔 등의 알 수 없는 부정적인 기운이 음성 신호를 통해 전달되고 있었다.


"사연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저는 그런 직접적인 어휘 사용을 즐기지 않습니다."


현수는 어쩐지 '살해'라는 단어에 꺼림칙함을 느꼈다. 


분명 그가 하는 일이 그 단어와 거리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의뢰자의 이런 직접적인 표현은 섬뜩할 정도로 어색했다.


그는 확실히 '최선'을 선택하기보다 '최악'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선한 업적을 남길 수 없다면, 최악의 것들을 제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전화 속 여성은 내성적인 말투를 가졌으나 의외로 사건에 적극적이었다.


"얼마가 들어가도 좋아요. 최대한 빨리 처리해 주세요."


그녀는 현수가 조금 전 했던 단어 선정에 대한 지적에는 관심 없는 듯했다. 


현수는 법을 어기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현수는 정의를 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현수는 언젠가 어린 여자아이를 살해한 한 노인의 이야기를 기억했다.


그 노인은 안타깝게도 그의 첫 번째, 살해 타겟이었다. 현수는 그 노인네를 살해했다. 


우리 법은 '죗값'을 '교화'로 갚게 했다. 아무리 쳐 죽일 짓을 한다고 하더라도 일정 수감 생활을 하면 어김없이 사회로 복귀시키곤 했다. 


그깟 형량은 죗값이 아니라, 수감자의 교화 기간에 불과했다. 


사회가 사회를 바꾸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던 그는 한 때, 잘 나가는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잘 나가는 '변호사 사무소'를 정리하고 지금의 직업을 가졌다.


그의 첫 번째 희생양인, 그 노인네는 그의 딸을 죽인 범인이었다.


그 망할 노인이 딸을 죽인 사건으로 그는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됐다. 


또한, 사랑하는 딸을 잃었다. 


이 일에 죄책감을 가진 현수는 한동안 패인과 같은 삶을 살았다. 일생 입에도 데어보지 않은 그지만, 한동안 술에 쩔어 살았다.


행복한 일상이 무너져 버린 건 순간이었다. 


현수는 피 끓는 감정을 뒤로하고 함께 고시 준비를 하던 명훈을 찾아갔다. 명훈은 어려운 시기 함께 공부하던 고시 동기였다. 


자신의 동기인 명훈이 딸의 살해 사건 담당 검사가 된 것은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현수는 그것이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용의자에 대한 모든 수사 상황을 현수는 함께 하고 싶었다. 이 일에 명훈은 자신의 일인 양 나서 도왔다.


용의자가 그 노인네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이후 현수가 노인네를 살해 할 수 있는 원인이 됐다.


가끔은 법조계에 몸 담고 있던 자신이 이처럼 흉측한 사건에 휘말려 있는 일이 아이러니 하긴 했다.


다만 그 또한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고통과 아픔이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능한 변호사였던 현수는 더는 변호사 일을 할 수 없었다. 


동기 명훈에게서 겨우 넘겨받은 용의자 신상 정보를 가지고 끈질기게 그를 추적하는 삶을 살다 보니, 자신과 같은 상황에 쳐한 누군가를 도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달라져 버렸다. 그는 더이상 변호사가 아니라, '살해범을 쫓는 살해범' 이 됐다.



전화 너머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명확했다. 


"제가 가진 모든 재산을 드리겠어요."


현수는 그녀의 간절함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돈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의뢰자분의 전 재산은 필요 없습니다. 상대의 이름을 비롯한 간단한 신상 정보만 알려 주세요."


현수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그놈의 신상 정보를 읊었다.


"이름 정현수, 전직 변호사, 마흔 정도에 이혼한 지 10년 정도 됩니다. 죽은 딸이 있는 남자에요."


현수는 얼굴이 굳어졌다. 


다소 흔한 이름이지만, 의뢰받은 사건에서 자신의 이름과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직업과 이혼 경력까지 모두 일치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입에서 나온 상대는 바로 자신이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현수는 상대에게 물었다. 


대게 사연 따위는 묻지 않는 것이 직업의 철학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살해해 달라는 의뢰를 받은 경우는 분명 예외다.


"일 처리하는데, 사연도 필요한가요?"


상대의 목소리는 다름 아닌, 전처 '지영'이었다. 


"아니요. 그러진 않습니다만, 일단 알겠습니다. 그러나 착수금 7천에 잔금은 작업 뒤 보내시면 됩니다."


10년이나 지났지만, 전처의 목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끔찍했다. 


지금도 아이를 잃은 그녀의 울음소리가 귀에 훤하게 들렸다. 


사랑하는 딸, '수현'을 잃은 슬픔은 단순하지 않았다. 


'수현'은 남들과 다른 아이였다. 


선천적 희귀 유전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같은 직업을 가졌던 아내 '지영'이 일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해야만 했다. 


세월이 지나고 지날수록 딸 '수현'의 병은 악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발달이 조금 늦나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딸 수현은 겉보기 안쓰러울 만큼 심각한 상황까지 갔다. 


아내는 그런 수현을 지극 정성으로 돌봤다. 그러나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지영의 정성과 다르게 딸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그런데도 현수의 경력은 나날이 높아졌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유명할 만큼, 성공적인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같은 업종에 일하던 '지영'은 그런 '현수'에게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자신은 딸을 위해, 변호사 사무실을 출근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현수는 가정 일은 둘째로 치는 눈치였다.


남편의 일이 잘 될수록, 지영의 감정은 더 복잡해졌다.


현수는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무언가가 '윤리'보다 '법리'여야 한다고 믿었다. 


법리에 근거하여 죗값을 흥정하고 용의자를 변호하는 것에도 적당한 정의감이 있었다. 


누구나 법적인 변호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심지어 어린아이를 살해하거나 노인을 폭행하는 사건에도 기꺼이 성공적인 결과를 끌어냈다. 


이를 지켜보던 친구인 검사 명훈은 그런 현수를 보고 이야기했다.


"현수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냐? 세상에 수임받을 일이 있고 아닌 일이 있는 거지, 그 정도는 가리면서 해야지 않아? 이게 네 발목을 잡게 될 수도 있어."


현수는 '검사의 충고'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현수의 가치관에서 검사란 억울한 이를 위한 정의감보다는 처리해야 할 업무를 쌓고 의무감만 앞선 공무원일 뿐이었다.


"아무도 이런 이들을 변호하지 않으면, 만에하나라도 있을 억울한 누명은 누가 해명해줘?"


현수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명훈은 현수가 ‘지나치다’를 말하고 있었다.



10년 만의 첫 대화, 그것은 전처인 지영이 자신을 살해해달라는 의뢰였다. 


지영과 현수의 결혼 생활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아이를 잃은 뒤에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둘은 결국 이별을 선택했지만, 그 전까지는 권태의 기간에 약간 소원했어도 나쁘진 않았다.


현수에게 지영은 만족스러운 아내였다. 다만, 지영에게 현수는 반대였다. 지영에게 현수는 가정을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가장일 뿐이었다. 


지영의 의뢰에 현수는 일단 응했다.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전처의 전화를 받고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도 특히나 이상할 뿐이었다.


현수가 10년간, 이 일을 하면서 지켜오던 철칙 중 하나는 의뢰인을 마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그 철칙을 깨고 싶었다. 


10년 전, 헤어진 아내의 얼굴이 궁금해서만은 아니다. 


만남은 일방적일 예정이다. 현수는 지영을 지켜볼 예정이고, 지영은 현수를 찾지 못할 예정이다.


현수는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금산역 8번 출구로 나와서 대한은행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무인 스터디 카페가 보일 겁니다. 그 건물 2층에 ‘플라스틱’이라고 적힌 분리수거함 속에 현금 7천을 넣고 문자 주세요. 오후 3시에 정확하게 부탁합니다.”


보통 의뢰인들이 방문하기 1시간 전에 건물은 잠금이 해지된다. 


그리고 방문 1시간 이후 건물은 잠금장치가 걸린다. 


현수는 의뢰인이 완전히 건물 밖을 빠져나오고 문자가 오면 그때야 건물로 들어가 현금다발을 들고나오곤 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건물은 고시 공부 시절, 자주 다니던 무인 스터디 카페였다. 


그곳의 주인은 아무도 찾지 않는 무인 카페를 꾸준히도 열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변호사를 그만두고 딸 아이의 아픔을 겪은 현수는 '청부살해업'으로 직업을 바꾸고 그곳을 매입하기로 했다. 


주인 자신 또한 고시 공부를 오래 했던 경험이 있다고 했다. 돈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라, 결코 팔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오래 공부하는 고시생 중 일부에게라도 좋은 공간을 열어두고 싶었다고 주인은 말했다. 


그를 설득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끈질긴 설득 끝에 현수는 이곳을 매입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처럼 수금을 위한 장소로 이용했다. 


물론 가끔 스터디 카페를 실제로 열어 운영하기도 했다.



예정된 시간이 다가왔다. 


오후 2시


지영은 묵직한 여행 가방을 끌고 금산역으로 향했다. 


그 길에서 그녀는 현수와의 신혼여행 날을 떠올렸다. 


그녀와 현수의 신혼여행은 환상적이었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은 마치 그들을 위해 존재하고 있었던 듯 완벽했다. 


그날의 날씨 또한 완벽했다. 


둘은 공동 변호사 사무실을 오픈했다. 


처음, 남편은 지독한 일벌레는 아니었다. 


적당히 일하고 평범한 일상을 즐기고 싶었던 지영에게도 나쁘지 않은 남편이었다. 


그러나 명훈에 대한 열등감으로 현수는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현수는 서서히 일에 욕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욕심이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때쯤, ‘명훈’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현수는 자리에 없어?”


명훈, 지영, 현수는 모두 사법고시 동기였다. 


내성적인 지영에게 현수를 소개해줬던 것은 다름아닌 명훈이었다. 


성실하고 악착같은 부분이 있으니, 내성적인 지영에게 적합한 상대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응. 지금 법원에 갔어. 오후나 돼야 올 꺼야. 커피라도 줄까?”


“아니야. 나도 이제 가 봐야 해. 잠깐 와봤어. 현수 오면 전화 좀 받으라고 해줘. 요즘 잘 나간다고 연락이 통 안되네.”


“응. 알겠어”


둘이 짧은 대화가 오갔다. 


워낙 바쁜 일정 탓에,연락이 좀처럼 되지 않는 현수를 명훈이 직접 찾아오는 일은 종종 있었다. 


현수는 그런 명훈의 발걸음이 신경 쓰였다. 


아무리 오랜 동기지만, 반반한 외모의 명훈이 지영과 마주하는게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현수의 집착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명훈’에 대한 열등감도 점차 심해지기 시작했다. 


딸 수현을 낳고 난 뒤에도 그런 의심은 커질 뿐 줄어들지 않았다.




2시 30분


지영이 금산역 8번 출구로 나왔다. 


조금 걸어가다 보니, 정말로 대한은행이 보였다. 


그 방향으로 조금 더 걸어가니 무인 스터디 카페가 나왔다. 


지영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현수와의 통화 내역을 되뇌었다. 현수의 목소리는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그답게, 자신을 살해해달라는 의뢰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가 ‘청부살해업’을 한다는 사실은 ‘명훈’에게 얼핏 들었다. 


검사의 입에서 ‘그 녀석, 그 사건 뒤로부터 청부살해를 업으로 하고 있어’라는 말을 들으니, 어딘가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명훈은 그의 오랜 친구가 가진 ‘세상에 대한 잘못된 시선’을 검사로써 모른 척 해주고 있었다.


지영은 자기 몸만 한 여행가방을 들고 2층으로 계단을 올랐다. 


커다란 가방을 들고 2층까지 오르는게 여자로써 쉽지는 않았다. 그녀는 안간힘을 쓰고 2층으로 가방을 옮겼다. 


2층에는 허름한 건물에 맞지 않는 큰 분리수거 함이 있었다. 그곳에 겨우 가방을 옮겨 담았다. 그리고 급하게 건물을 뛰쳐나왔다.


지영이 가방을 분리수거함에 담는 그 순간, 현수는 그 자리에 있었다. 


지영을 내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정말로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그녀가 그 자리에 찾아온다면, 그는 자신을 살해해야 한다는 의뢰를 실행해야 했다. 다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현수는 자신의 몸만 한 가방을 겨우 들어 올리는 지영을 안타깝게 지켜봤다. 


어쩐지 그녀를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아이러니하게 그의 손에는 그녀를 살해할 흉기가 들려 있었다.


지영은 황급하게 그 자리를 뛰쳐나오며 문자를 보냈다. 


“지금 넣고 왔습니다. 빠른 일 처리 부탁합니다.”


그리고 핸드폰을 껐다.


현수는 빠르게 지영을 쫓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지영이 이런 의뢰를 한 이유는 ‘현수’에 대한 증오심이 때문이었다. 


딸 수현이 그렇게 된 것도 모두 현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뢰를 통해 현수가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길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현수는 그런 선택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지영은 만약 일이 잘못되더라도 현수가 죗값을 받을 수 있도록 ‘명훈’에게 부탁해뒀다. 


즉, 현수가 자신을 위협하면 체포될 수 있도록 할 생각이었다. 


어느 날 명훈이 지영을 찾아와 이야기했다. 


“그 녀석, 더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내지 못하게, 우리가 이쯤에서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해.”


명훈의 제안은 솔깃했다. 현수가 잡히면 법적인 죗값을 치르게 하고, 만약 그러지 않는다고 해도 그가 자살을 선택하면 더 좋은 일이었다. 


마침 현수는 그 일에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끼는 그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지영의 문자가 현수의 핸드폰에 도달했다. 


지영을 쫓지 못한 현수는 일단, 흉기를 가슴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창밖을 통해 달려나가는 지영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현수는 지영이 분리수거 함에 집어넣은 여행가방을 꺼냈다. 그리고 자신의 스터디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카페는 역시나 비워있다. 조용한 카페에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고 들어갔다. 여행가방은 묵직했다. 


다만, 여태껏 의뢰받은 바와 다른 묵직함이 불쾌했다. 


검은색 커다란 여행가방은 비밀번호로 잠겨 있었다. 


현수는 지영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전화를 걸었으나 지영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그는 이상함을 느꼈다. 


혹시,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챈 것은 아닐까. 현수는 생각했다. 그럴 리 없다. 그럴 이유도 없을 것이다. 


현수는 가슴팍에서 지영을 살해하기 위해 숨겨두었던 흉기를 꺼내 여행가방을 찢었다. 생각보다 깊게 들어간 칼에 돈이 상하진 않았을까 염려됐다.


캐리어를 열자 커다란 검은색 비닐봉지가 다시 나타났다. 꼼꼼하고 내성적인 지영의 성격이 다시금 생각이 났다.


'그래... 지영이 답군...'


현수는 손으로 비닐을 뜯었다. 그리고 소리 내 구역질을 했다.


‘웩’


거기에는 ‘돈’이 아닌 이미 썩을 대로 썩은 누군가의 시체가 들어가 있었다. 


현수는 캐리어에서 뒷걸음질 쳤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물론, 지영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냈다는 정도는 생각해 낼 수 있다. 그래도 시체를 담아 보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현수는 황급히 가방을 닫았다. 그 순간, 건물 밖에서 큰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사건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인제 와서 보니 현수가 들고 있던 흉기에 캐리어를 열면서 붉은색 피가 살짝 묻어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건물 밖에서는 경찰관들의 발걸음 소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정현수 씨, 그곳에 있는 거 알고 있습니다. 문 열어주세요.”


현수는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았다. 


급히 안쪽으로 들어가 창문을 열었다. 


이미 사방에 경찰이 모두 포진되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지영은 벌써 10년이 넘은 사건이지만 기억이 생생했다. 


명훈과의 관계가 현수에게 들킬까 봐 걱정했던 기억은 지금도 꿈이 되어 찾아왔다. 


현수와 소원해질 때쯤, 명훈은 종종 지영을 찾아오곤 했다. 


처음부터 그런 관계는 아니었으나 점차 명훈과의 관계는 발전했다. 


초기에는 지영이 명훈과의 아이를 낳은 뒤에도 현수는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 


되려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바쁘게 살 뿐이었다. 


지영은 명훈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의 이름을 현수의 성을 따서 지었다. 이름은 ‘수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현수는 점차 유능한 변호사로 자리를 잡았다. 


딸 수현의 건강문제는 언제나 명훈과 지영의 걱정이었다. 물론 법적인 아버지 현수에게도 걱정이긴 했다.


‘수현’이 자신의 아이라고 믿고 있는 현수가 아이와 자신에게 무심한 것이 어떨 때는 감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어떨 때는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웠다. 


영화에서 보던 ‘사이코패스’처럼 현수는 감정 없는 사람 같았다.


그와의 관계는 빨리 정리하고 싶었다. 어차피 ‘수현’도 ‘명훈’의 아이일 뿐 아니라, 현수와 헤어지고 명훈과 관계를 이어가면 모든 게 원만할 예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현수의 의심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현수는 명훈과 지영의 관계를 의심할 뿐만 아니라, ‘수현’의 출생에도 의심을 품는 듯했다. 


친자확인에 관해 이야기하던 어느 날, 싸움이 크게 번졌다. 


그와의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지영은 결정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발생한 것이다.


현수는 자신의 추론이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모든 게 자신의 착각이고 의심일 뿐이길 바랬다. 


하지만 점차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영의 이중성에 소름이 끼쳤다. 


명훈의 존재는 생각할수록 소름 끼치게 증오스러웠다. 


현수는 ‘청부살인업자’를 찾았다. 


변호사업을 하다 보면 관련 의뢰가 종종 들어오기도 한다. 


그렇게 알게 된 커넥션을 현수는 되려 이용하기로 했다. 


청부업자는 노인이었다. 


저런 노인네가 과연 누군가에게 위해를 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그도 처음 겪는 일이고 유일하게 아는 경로였다. 


노인에게 위탁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노인은 70은 넘어 보였다. 얼핏 웃는 인상이 선한 게 전혀 이런 일을 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현수는 노인을 협박했다. 자신은 변호사고 노인은 불법을, 그것도 ‘살인’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었다. 


노인은 흉악한 일을 하는 사람 같지 않게 순진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연쇄 살해범’으로 체포할 수 있다고 협박했다. 


노인은 크게 겁을 먹고 대가 없이 의뢰에 응하기로 했다. 다만 현수는 노인의 앞에 돈다발을 올려놓았다.


“이 정도면 앞으로 이런 일을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이것은 착수금일 뿐입니다. 성공하시면 두 배로 드리겠습니다.”


시간이 지났다. 


노인네는 명훈을 살해하는 것에 실패했다. 


다만, 겁많은 노인이 명훈 옆에 있던 딸 수현을 실수로 찔렀다. 피가 범벅이 되고 노인네는 현장에서 체포됐다. 


제아무리 청부 살해업자라고 하더라도 어린 소녀를 살해한 노인은 죄책감이 들었다. 


이 사건의 담당 검사는 ‘명훈’이었다. 대게 사건과 연관된 일을 맡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명훈과 '수현'은 법적으로 남이었다.


사건 현장에는 명훈과 수현, 지영이 있었다. 명훈은 자신이 이 일을 맡아야 된다고 여겼다. 


그리고 살해 노인네를 붙잡고 협박했다.


"노인네. 나는 이 자리에 없던거야. 내가 이 사건 담당 검사가 되면, 최대한 신경쓸테니 누구의 의뢰인지 바른데로 불어."


그 사건이 있고 사건에 대한 조사는 시작됐다. 다행이도 노인네는 나름의 직업 철학이 투철한 사람인듯 했다. 


결코 현수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수는 불안했다. 


언제라도 그 노인네가 입을 열어 모든 것을 밝힐 것 같았다.


이런 불안감 뿐만 아니라, 자신의 딸을 살해한 노인네에 대한 증오감도 함께 일어났다.


“내 딸이 살해당했어. 가만히 둘 수 없어.”


자신의 의뢰 때문에 딸 수현이 살해됐다.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딸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키운 정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증오감과 불안감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재생산됐다. 그 노인네를 없애야 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고 지영과의 이혼은 순식간에 진행됐다. 


지영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 이혼을 서둘렀다. 


현수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기억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 노인네를 죽여야만 했다. 


현수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교도소 내에서 자살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노인네를 그렇게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현수는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했다. 그 노인네를 교도소 내 자살로 위장 살인했다. 


그렇게 그의 직업은 방향이 달라졌다. 한 번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뒤, 이 일에서 발을 빼기는 쉽지 않았다. 


현수와의 이혼 후, 지영은 명훈과 동거를 시작했다. 


정식 결혼 생활은 아니었으나, 딸을 잃은 슬픔을 함께 공유하는 지영과 명훈은 나름으로 열심히 살았다. 


다만, 딸의 죽음을 맞이한 ‘명훈’과 그 사건을 뒤로 무능한 ‘생물학적 아버지’ 자신을 비관했다. 


사건은 10년이 지났지만, 이 기억은 명훈에게 마음의 병을 만들었다. 


어느 날, 지영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조용한 공기. 


욕조에서 흐르는 물소리, 이상함을 지영은 이상함을 느꼈다. 


급하게 욕실의 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손목이 그어진 명훈의 시체가 있었다. 


지영은 견딜 수 없었다. 


명훈의 시체 옆에는 옛 친구에 대한 당부가 적혀 있었다. 


이것은 그의 유언이었다.


유언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2화에서 계속>



최근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소설을 자주 읽다보니 재밌어서, 짧게 추리 소설 하나 써봤습니다.

반응보고 연재하겠습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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