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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Mar 28. 2022

[종교] 복음의 본질_설교자는 누구인가

 '가라사대'

나는 살면서, '가라사대'라는 말을 일상에서 단연코 써 본 적이 없다. '가라사대'는 '가로되'를 높인 말로 '말씀하시다'라는 뜻이다. 이는 실제 더이상 모국에서 조차 사용하는 사람이 없는 '사어(死語)'다. 굳이 찾아본다면, 제주 사투리 중에 '말하다'를 '고르다'라고 하는데, 이것이 '아'와 '오'의 중간 정도 소리가 나는 '아래 아'를 쓰고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을 제외하고 '가로다'라는 말은 사용하는 사람도 없고 들어도 어색하다. 대통령 할아버지가 온다 해도 '말하다'를 어떻게 하면 높여야 할지 고민하지 않는다. 다음은 '요한 복음 19장 28절~30절'의 내용이다.

 "이 후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에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한 복음 19장 28절~30절

 모자람이 많은 나는 읽는 내내 불편함이 느껴졌다.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돌아가시니라'. 무지한 나에게는 이 글들은 어렵다. 이 것은 과연 번역의 문제일까. 

"Later, knowing that everything had now been finished, and so that Scripture would be fullfilled, Jesus said, "I am thirsty." A jar of wine vinegar was there, so they soaked a sponge in it, put the sponge on a stalk of the hyssop plant, and lifted it to Jesus' lips. When he had received the drink, Jesus said, "It is finished." With that, he bowed his head and give up his spirit."

물론 이는 일부에서 '가짜영어성경'이라고 여기기도 하는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이다. 그러나, '킹 제임스(King James Version)'에서도 '1599제네바 성경'에서도 모두 '가라사대'에 해당되는 부분은 'said'라고 표현되어 있다. 굳이 said를 '이르되', '가로되', '가라사대'로 바꾸는 이유는 무엇일인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원어인 '히브리어'의 경우는 다를까. 그렇지 않다. 글이 어렵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한다는 목적이라면,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하는 '종교적 언어'는 사실상 '종교적 언어'가 아니라 '사어(死語)'가 많다. 이미 익숙해진 이들끼리 내부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사회적 방언'이라고 한다.

 '복음전파'가 목적이라면 그 용어는 최대한 쉬워야 한다. 설교자는 누구인가. 설교자는 교단에 서서 대중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이다. '복음'이라는 말조차, 사실상 비종교인들에게 어색할 수 있다.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복음'이란 '복된 이야기'를 이야기한다. 들으면 '이로운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다면, 최대한 쉽고 재밌게 전달해야 한다. 이것은 '종교적' 색채와 무관한다. 효과적인 전달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설교자'는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다. 복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성경(가르침)'을 전달하는 전달자다. 성경복음은 마법이나 요술을 담고 있는 판타지 소설이 아니라, 복된 이야기를 통해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이들을 고통과 어려움에서 구해주는 '출처'다. 여기에 전달자의 역할은 중간자 역할이다. 간혹, '원출처'를 잘못해석하여 '신의 이름'을 빌려 그의 말의 힘을 자신의 권력으로 사용하거나, 잘못된 해석으로 다른 이들을 잘못된 생각으로 이끌기도 한다. 중간자는 원출처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넘겨 주는 것이 본질이다. 이런 본질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충만한 성령'보다 '원출처'의 글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문해력'과 상대에게 좋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전달력'이 필요하다. 종교는 이 '복음(이로운 이야기)'가 전달 과정에서 변질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 한다. 그러다보니 본의아니게 이야기가 왜곡되거나 지나치게 어렵게 보존되기도 한다. '락'을 하셨던 목사 님의 책이기에, 음악에 빗대에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복음전파는 소리를 저장할 방법이 없어 음악기호를 통해 악보를 만들어 음악을 전달하던 시기와 같다. 여기서 '설교자'는 연주자에 해당한다. 작곡가가 멋지게 지은 노래를 연주하여 대중에게 멋진 음악을 선물하는 것이다. 즉, 악보에 상관없이 내 멋대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작곡가'와 '청중'을 기만하는 것이다. 다만, 시대가 지나면서 아름다운 노래를 더 잘 보존하기 위해, 우리는 '음악'이라는 본질을 잃어버리고, 악보를 더욱 소중하게 보관하는 것에 목숨을 건다. 

  불교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觀世音菩薩)이 그렇다. 글이 없던 시기에 어떻게든 소리로 내용을 전달하던 당시에는 일단, 내용 전달보다 정보가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 중요했다. 앞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한자로 적혀 있으나 원래는 '산스크리트어'다. '나무'는 '나마스'라는 뜻이다. 우리가 인도나 네팔에서 사용하는 '안녕하세요'의 번역인 '나마스 떼'의 '나마스'다. '떼'가 you(당신)을 의미다., 나마스는 '귀의하다'라는 뜻으로, '쫒아 따른다'라는 의미다. '아미타불' 또한 산스크리트어다. 이는 '아밋따 붓따(amita budda)'라는 뜻으로 아밋따는 '무한하다'라는 뜻이고 붓따는 '부처는 깨어있는 자'를 말한다. 즉, 나무아미타불은 '부처를 무한하게 따릅니다'라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관세음보살'은 '아바로킷따 이슈와라'아는 산스크리트어로 '모든 것을 훤하게 내려다보는 자'를 의미한다. 즉, 산스크리트어로 된 '복음(이로운 이야기)'이 전달자가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한자어로 번역하면서 우리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말은 이해하지만 그것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훤하게 꿰뚫어보는 자를 무한히 따르겠습니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단순히 해리포터의 마법 주문인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처럼 일종의 주문이라고 여기는 상당수의 것들은 사실상 본질을 잃어버린 일종의 기록일 뿐이다. 설교자는 누구인가. 설교자는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가.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가. 그것은 진짜 이야기를 전달하는 설교자의 역할이 누구보다 더 중요하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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