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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Apr 03. 2022

[심리] 고통의 근원에 대한 비밀_메모리코드

 릴케는 '인생은 고통이고 슬픔으로 가득 찬 감옥'이라고 했다. 고통의 본질을 고민하던 사상가는 그 밖에도 많다. 석가모니와 쇼펜하우어 역시 고통의 본질을 고민하였다. 인생은 아름답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름다움보다 '고통'을 더 깊게 느낀다. 염세주의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라는 것은 아니다. 본질을 직시하는 것은 그저 다가 온 고통을 모르쇠로 일관하여 외면하는 것과 다르다. 우리가 그러지 않다고 곱씹고 되뇌여도 우리의 대부분은 인생에서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모두 겪을 것이며, 그 중, 희(喜: 기쁨)와 락(樂: 즐거움)보다는 노(怒: 성냄)와 애(哀: 슬픔)를 더 크게 인식을 할 것이다. 원래 인간은 그렇다. 우리를 생존하게 하는 기본 원리는 생존지향성(survival orientation)이다. 인간은 종족과 개체보존의 법칙을 철저하게 지켜내기 위해, 위협에 기민하게 진화해왔다. 우리가 겪어오는 수 많은 기억은 모두 장기 기억으로 넘어가지 않고 일부는 단기기억이나 외현기억, 암묵기억으로 넘어간다. 그중 생존에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기억은 반드시 장기기억으로 전송시킨다. 그것이 우리를 생존케 하는 '본능'이다. 결국 우리의 머리속 해마 옆에 있는 편도체는 공포와 두려움 등의 고통의 감정에 반응한다. 이것이 장기기억으로 넘어가줘야, 우리는 맹수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 두려움을 이용하여 '조심'히 행동하고 움추려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은폐한다.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칭찬받은 기억보다 혼난 기억이 더 먼저 떠오르는 이유도 사람은 대게 나쁜 일을 오래 기억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기억의 내용이 상실되더라도 감정과 불안, 공포라는 아주 효율적인 압축파일로 저장됐다가 불현듯 떠오르게 한다. SNS를 들여다보면,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곳에서 혼자만 고통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좌절하거나 우울해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다. 우리의 사피엔스 종은 참 어리석게도 가장 행복한 순간을 '인터넷 클라우드 서버'에 남기고, 가장 불행한 기억을 '자신의 편도체'에 남긴다. 

 책은 과학과 오컬트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모든 내용에 공감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책은 어떤 의미에서 나에게 새로운 인사이트를 분명 던졌다. 어떤 책이던 읽다보면 작가와 생각이 다를 때가 있다. 그렇다고 그 책이 잘못됐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흥미롭게 읽어 내려갔다. 한때, 나 또한 어떤 작가의 책을 평가했던 적이 있다. '상당히 실망스러운 책입니다.'라는 평을 달았던 적이 있다. 그것에 굉장히 큰 후회를 한다. 나 또한 내 집필서적에 대한 리뷰를 꼼꼼하게 챙겨본다. 그럴때면 당연하게 좋은 이야기만 적혀 있지는 않다. 어떤 누군가는 부끄럽게도 '인생 책 중 하나'로 꼽기도 하고, 너무 좋았다며 여러 권을 더 구매하여 주변에 선물하기도 했다고 했다. 반면 다른 누군가는 되려 '인쇄된 종이가 아깝다'고 하거나 '작가에게 속았다'라며 평가하기도 한다. 같은 글을 보고도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책'이 '상대적인 도구'이기 때문이다. 같은 거울을 들여다 보고도 '남자'가 서 있기도 하고, '여자'가 서 있기도 하며, 멋있는 사람이 서 있기도하고, 그렇지 않은 이가 서 있기도 하다. 이유는 '거울'이 잘못 만들어진 이유도 간혹 있겠지만, 보통 '거울'이 '상대적인 도구'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어디를 비췄느냐', '누구를 비췄느냐'에 따라 거울은 완전히 다른 결과물을 보여준다. 1548년 생인 조르다노 브루노라는 이탈리아의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무한 우주와 세계에 관하여'에서 교황청에 반하는 주장을 했다. 그 주장으로 인해 그는 교황청에서 이단으로 분류됐다. 그는 당시 '성경'의 해석에 불만이 많았다. 삼위일체를 부인하거나 그리스도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바라봤다. 그런 그에게 교황청은 불순한 해석을 철회하지 않을 경우 사형시키겠다고 엄포를 놨다. 그러나 그는 철회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그는 화형당했다. 그가 사망하고도 수 백 년 간, 그의 명예는 회복되지 않았다. 20세기나 되서야 이 종교 재판의 잘못됐음이 인정되고 1979년에서야 사형판결이 취소 됐다. 내가 믿는 진리는 결코 영혼불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이나 종교에서도 분명하다. 내가 중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중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내가 모르는 영역에 대해 활짝 열어 두고 상대의 이야기에 일말이라도 재고할 필요는 있다. 즉, 나쁜 책은 없다.

 우리가 겪었던 기억들이 반드시 우리에게 되돌아오고 그중 장기기억으로 넘어간, '부정'의 감정들은 다시 현재의 나에게 간섭할 것이다. 오래된 기억을 잘 정리하고 다듬지 않는다면 이 기억들은 분명 '독'이 될 것이다. 같은 샘물을 마셔도 '독사'는 '독'을 만들고 젖소는 '우유'를 만든다. 우리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언제나 '독성'을 만들어낸다. 그 독성으로 상대를 죽이기도 하고, 가끔은 '자신'을 죽여 '나는 맛없는 고기입니다'라는 신호를 뿜어내기도 한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극하게 받아 독성을 스스로에게 투여하고 있다면 그것을 멈춰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기억은 그 고통의 원천이 된다. 그 기억을 잘 다듬고 직시하는 것은 몹시 중요하다. 아무리 되돌리고 떠올려봐도 도대체 고통의 근원이 자신이게 있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 백 년 전, 내 조상의 기억이 유전적으로 되물림 될지도 모른다는 시선도 있다. 현대 사회에서 '조상의 업보'를 '후대'가 받는다라는 '비과학적'인 말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우리 모두는 우리 조상이 나무 위에서 내려 온 업보 때문에 '직립보행'하는 진화를 겪었다는 것과 연결시켜 볼 수 있다. 조상과 내가 전혀 다른 개체라고 여기는 것도 사실상 굉장히 비과학적인 접근이다. 수백년 전 조상의 과보를 후대가 받는다는 '영적'인 믿음의 영역이 아니라, 분명 우리 모두는 조금씩의 진화를 거쳐 성장해왔고 인간의 역사 대부분은 철저하게 '가문'만의 직업과 역할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점이다. 수 만 년을 올라갈 것도 없이 동양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불교' 또한 '고(苦: 괴로움)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했다. 그것을 피하지 말 것이며, 부정하지 말 것이며, 인정하되 사로잡히지 말고 받아들이되 빠지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를 객관적인 입장으로 바라보고 그 현상에 대해 냉철하게 바라보는 것을 '수행'하는 것이 오랜 동양 철학의 사상이다. 오래 전 부터, 동양은 밀농사를 짓는 서양과 다르게 '관계'를 중요시 했다. 집중호우기에 풍부한 강수량으로 벼농사를 짓던 동양인들은 보를 짓거 관개사업을 할 때, 항상 공동체적으로 움직여야 했음으로 관계설정은 굉장히 중요했다. 아들러의 말처럼 관계설정에서 부터 열등감이나 우월감 등 다양한 감정이 생겨남으로, 동양의 이런 철학의 뿌리는 역사적으로 신임이 가기도한다.

 두고 두고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다. 인생의 고락이 어디서 부터 출발했는지, 그리고 지금의 나는 과연 과거와 그 윗대에서 부터 완전하게 분리 독립된 객체인지를 말이다. 우리 모두에게 잠들어 있는 기억들로부터 고통으로 해방되고 다시 오늘과 내일을 다르게 살 수 있게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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