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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Apr 08. 2022

[일상] 과도한 정보가 머리 속으로 헤집고 들어오는 날

 참 별거 아니었던 것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엄청난 무게로 다가온다. 별거 아닌 일로도 세상천지가 개벽하기도 한다. 1989년 11월 9일이 그랬다. 사건이 있기 한 달 전, 유럽의 한 공산당 지도자가 물러났다. 그 후, 비공식 대변인이 임명됐다. 전임자는 후임자에게 11월 9일에 발표할 임시 여행 규정 변경 사항을 인계했다. 그러나 서구 미디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후임자는 기자회견에 대한 준비가 미흡했다. 회견장에는 막 임명된 후임 대변인이 질의응답하기 곤란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대본에 없던 질문이 나왔다. "동독인들은 언제쯤 자유롭게 서유럽을 여행할 수 있나요? 그 법은 언제 발효됩니까." 그 질문에 대변인은 대답했다. "지금 당장입니다." 개정된 여행법을 잘 몰랐던 대변인의 임기응변이 TV로 방송되자마자, 수많은 동독인들은 베를린장벽으로 달려 들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 국경수비대가 손을 쓸 수 없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사람들은 도끼와 망치로 장벽을 무너뜨려버렸다. 동독 정치국의 대변인인 권터 샤보브스키(Günter Schabowski)의 작은 실수가 베를린 장벽을 무너 뜨린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임계치'에 차있던 일이 발생 했을 뿐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즉, 아주 작은 티끌과 티끌이 모이고 모이다가 어느 순간의 임계치를 넘어서면 그것이 표면에 들어나는 것이다. 수 천 톤의 물이 가득차 있는 항아리가 있다. 1톤의 물을 채워도, 100톤의 물을 채워도 표면적으로 달라지는 일이 없다. 다만, 작은 물방울들이 모이고 모이다가, 표면장력에 의해 아슬아슬하게 넘치지 않은 상황까지 도달했다면, 단 한방울로도 항아리의 물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99도의 끓지 않는 물을 끓게 하는데는 단 1도의 열이면 충분하다. 흔히 열정을 비유하기에 쓰는 말이지만, 이는 '스트레스', '신경'에도 충분하게 쓰일 수 있다.

 군입대를 하고 '유격'훈련을 할 때 일이다. 유격훈련을 입소하고 여러가지 자세 PT를 배우게 된다. 그중 8번 동작이 힘든 동작으로 유명하다. 이 동작은 그러나 단순하다. 그저 땅바닥에서 고개와 발을 띄우고 좌와 우로 다리를 옮기면 그만이다. PT체조를 처음 할 때는 알지 못한다. 머리에 쓰고 있던 '방탄모'와 '전투화'가 그렇게 무겁다는 사실을 말이다. 훈련을 지속할수록 그것들의 무게는 점차 올라간다. 따지고보자면 무게가 올라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느끼는 체감 무게가 올라갔을 것이다. 그저 1~2kg 정도의 가뿐한 무게는 점차 5kg, 10kg로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후에 그저 발을 들어 올리기 위해 내가 써야하는 힘이 두돈반 육공트럭만 해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주 가벼운 어떤 것도 시간과 반복이 축척되면 수 톤의 무게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내가 스트레스라고 여기는 것들은 별게 아니다. 열거해 보면 이렇다.

 '액정 오른쪽 위에 줄어 있는 배터리 용량'

 '주렁주렁 무엇 하나 하려고 해도 달려 있는 전선들'

 '회전력에 의해 작동되는 각종 기기의 소음'

 '수 억 년 전, 해조류나 동물성 플랑크톤의 사체들을 태워 만든 작은 폭발음들...'

 '인간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어야 강도의 순백색 조명들'

 '불쑥 불쑥, 언제고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궁금하지 않았던 소식들...'

 참 별거 아닌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이고 쌓인다. TV소리나 음악소리, 심지어 냉장고가 냉기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내는 미세한 모터와 팬 회전, 컴퓨터의 CPU와 냉각팬 소리까지. 생각보다 예민한 성격은 아니었으나 언제부턴가 몹시 거슬린다. 감각이 예민해졌다. 얼마 전, 2년 째 'CALM'이라는 명상 어플을 사용하고 있다. 어느날은 깨달았다. 충전이 필요한 이어폰을 귀에 꽂고 '비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어폰을 빼어 보니, 이미 자연에서 '비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위적인 것을 피하고자, 자연적인 것을 찾았는데, 자연적인 것을 인위적인 방법으로 찾느라, 자연적인 것을 놓치게 됐다.

 간혹 독특한 망상을 하곤 한다. 어느날은 그 대상이 '전자책'에 꽂혔다. 정말 종이 질감으로 출력하는 전자 잉크와 전자 페이퍼의 기술력에 놀라며, 얼마나 종이와 같은지를 보고 구매욕을 높혔다. 생각해보니, 가장 종이 같은 것은 종이 아닌가. 게다가 이것은 '접을 수도 있고'. '배터리도 없으며', '언제든 반영구 낙서'도 가능하다. 이쯤되면 전자책은 '종이'를 대체하기보다, 다른 대안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얼마 전, 스마트폰을 포기했다. 대신 가지고 있던 전자책으로 스마트폰을 대체 하기로 했다. 얼마나 이 습관이 지속될지는 모르겠으나 하나씩, 나를 옭아매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마이클 클라이튼'의 소설, '타임라인'을 보면 현대인들이 중세로 넘어가는 설정이 전개된다. 이 소설은 분명 재밌게 읽었으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중세로 넘어간 현대인들이 겪게 된 '불안한 심리'다. '마이클 클라이튼'은 경험해보지 않은 '완전한 정적'에 현대인들이 불안해 했다는 묘사를 했다. 벌써 20년이 지난 소설인데, 그 전까지는 완전한 정적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다 '뉴질랜드'의 외진 곳에 살면서 인간과 기계가 조금도 개입하지 않은 '완전한 정적'을 경험했다. 그 뒤로 제주를 살면서 아주 가끔 그런 시간이 불쑥 찾아 올 때가 있다. 그럴때면, 의미도 없이, 마이클 클라이튼의 소설 중 딱, 그 대목이 떠오른다. 어떤 생명이던 소음에 노출되면 좋지 못하다. 그것은 오컬트적 해석으로 볼 것 만도 아니다. 빛과 소리는 모두 파장이고 이 파장이 화학작용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우리는 광합성으로 알고 있다. 즉, 좋은 파장과 좋지 못한 파장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불과 100년, 우리는 경험해보지 않았던 환경에 살고 있다. 정신적으로 너무 혼란스러운 시기, 이런 스트레스들에 내가 너무 많이 노출 된 것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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