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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Apr 10. 2022

[인문] 공감이 선이라는 착각_공감병


 '그래서 푸틴을 옹호하는 겁니까?'


 '그래서 일본이 옳았다는 겁니까?'


 '그래서 중국이 맞다는 겁니까?'


 적잖이 이런 글을 맞이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어떤 생각을 올리거나, 한일합방이나 중국의 역사, 문화공정에 대한 어떤 글을 올리면, 이런 글이 달린다. 대중의 생각에 다른 시선을 올리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공감을 강요한다. 글은 차가워 보이지만 논지는 이렇다. 모든 일은 '있을만 해서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즉, 어떤 일이든 있을 법했기에 일어난다. 발생할 확률 49대, 일어나지 않을 확률 51이었다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양쪽 균형이 완벽하게 같은 양팔 저울에서 한쪽으로 기울였다면, 단지 한쪽에 어떠한 무게가 더해졌을 뿐이다. 저울이 기울여지는 현상은 한쪽으로 무게가 더 실렸을 때 일어난다. 모든 일은 일어나야 할 필연이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것은 선과 악을 따지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중력은 옳고 그름이나 선과 악을 따지지 않는다. 그냥 기본적이 일정 원칙을 따를 뿐이다. 그것은 종교, 문화의 용어에 따라 '순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신의 계획'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운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연에서 존재해서는 안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49대 51의 극미한 차이가 있고 그것으로 현상은 일어난다. 존재할만하기 때문에 존재할 뿐이다. 공들인 농사물이 갑작스러운 가뭄에 모두 시들어 버리거나, 존경할만한 이가 허망하게 죽거나, 내가 응원하는 정당이나 스포츠 경기가 이기고 지는 모든 일들, 내가 살고 있는 국가가 누군가에게 침공을 받거나 침공하는 일들, 노력에 대한 실패나 잔혹한 살인범이 무고한 아이를 죽이는 일들. 그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에는 '가치판단'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일어날 법한 일들만 일어날 뿐이다.



 '공감'은 집단을 결집시킨다. 내부 결집은 다른 말로 외부적 배타성을 갖는 말이다. 자석의 한쪽 극이 강력해질수록 반대쪽 극은 극심하게 강력해진다.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을 같은 편으로 둔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작게는 '반대편'으로 두기도 하고 극심하게는 '적'으로 간주한다. 역사에서 결집과 공감은 곧 '전쟁'을 야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랬다. 내부가 통일되고 안정되고 결집되면, 이 에너지는 '공감'을 명분으로 외부의 적을 만들고 '혐오'를 키웠다. 1467년과 1493년 '오닌'과 '메이오'의 반란으로 일본은 춘추전국 시대를 맞는다. 일본 내부에서 분열되어 각기 다른 세력을 갖던 시기는 100년 가까이 지속하다가 일본 전국이 통일되는 시기를 맞이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몽고의 징기스칸 또한 여러 유목민족을 통합하고 결속한 뒤, 세계로 뻗어 나갔다. 2차 세계대전의 히틀러 또한 공감과 유대를 명분으로 '혐오'의 감정을 갖고 밖으로 뻗어나갔다. 안타깝게도 공감은 배타성을 갖는다. 배타성은 혐오감정을 유발시킨다. 이것이 폭력의 원천이다. 어떤 전쟁도 명분이 없지는 않다. 현대 서구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해'라는 명분으로 여러차례 침략전쟁을 벌인다. 이것에 공감하지 않는 이들은 당연하게도 배타성의 대상이 된다. 내가 어떤 가치판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현상에는 이름이 붙는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있을 수 없다', '나쁘다'라고 정의하는 것은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왜곡시킬 뿐,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로 나는 '어떤 현상이던 일어날만 했다.'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왜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는지, 한국은 왜 일본에 병합됐는지, 중국은 왜 공정을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는 시도는 분명 가치 있다. 그런 시선을 갖는 것 조차 하지 말라는 것이 그 행위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언젠가 '황사'라는 현상에 놀라운 '언어유희'를 발견했다. 황사먼지가 중국에서 부터 날아온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다. 황사 먼지의 입자는 지름 1,000μm정도 된다. 이런 미세한 먼지가 기관지에 들어가면 병을 유발한다고 했다. 얼마 뒤, 황사보다 더 미세한 먼지에 대해 메스컴은 떠들었다. 바로 '미세먼지'다. 미세먼지는 지름 10㎛이하의 먼지를 이른다. 이처럼 미세한 먼지는 아이러니하게도 2.5㎛이하의 초미세먼지보다 크다고 했다. 즉, 더 가는 초미세먼지가 더 작다는 것이다. 그런데 작년부터 '극미세먼지'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이는 0.1㎛이하의 크기라고 했다. '작다', '미세하다'는 것은 결국 '상대적'이다. 어떤 것을 '작다'라고 표현하기 위해선 '기준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 애초에 '황사'를 기준으로 비교를 시작했으니, 더 작은 덩어리를 발견할수록 점차 용어가 희귀해진다. 만약, '극미세먼지'를 먼저 비교대상에 뒀다면, 황사의 명창은 '거대입자먼지' 쯤 됐을 것이다. 즉, 미세먼지 자체는 '미세하다'하지 않다. "무언가에 비교했을 때, 미세하다"라고 보는 것이 맞다. 모든 것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다. 커다란 바퀴벌레를 보더라도 '명왕성'과 비교하면 '극미세'하고, 명왕성이라고 하더라도 '은하'에 비교하면 극미세하다. '공감'은 상대적이다. 어떤 것에 공감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가치판단을 요구하고, 공감하지 않는다고 정의하면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공격성을 갖는다. 지난 2022년 2월 24일부터 2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한다. 물론 안타까운 일이다. 다만 같은 시기, 대한민국 남성 1400명 이상이, 여성 700명 이상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우크라이나 민간인 사망'에 대해 돕지는 못할 망정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시나요?"하는 글에 대답하자면 이렇다. 물론 안타깝다. 다만 메스컴이 어떤 쪽을 비추느냐에 따라 더 극적이고 더 안타까운 것은 없다. 누군가에게는 우크라이나 민간인 사망자보다 대한민국 자살자가 더 큰 관심이 필요할 수 있다. 모든 것은 '황사'와 '극미세먼지'와 같은 상대적 판단일 뿐이다. 



 모든 현상은 현상일 뿐이다. 그것에 공감하느냐 공감하지 않느냐를 강요하는 것 또한 다른 방식의 폭력이다. '선'과 '악'을 구분 짓는데, 자신이 '선'이라는 명확한 잣대를 이미 세워두고 상대의 가치 판단을 시험한다. 이런 행위 또한 정당화 할 수는 없다. 모든 현상은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 냉철하게 그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훨씬 더 그 일에 대해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는 방법이다. 내가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고는 어떤 해결책도 만들지 못한다. 그것은 일종의 도피일 뿐이다. 간혹 내가 이해범주 내에서 일어나지 않는 현상에 대해 사람들은 '상식불가', '이해불가'라고 말하지만 그 또한 일어날법한 일이들이고 그 문제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현상이 잘못됐기 때문이 아니라, 내 이해 범주가 그곳까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상을 현상으로 바라보는 일은 불필요한 '공감과잉'을 멈추고 세상을 폭력에서 부터 멀어지게 하는데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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