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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Apr 14. 2022

[인문] 왜 수학적 사고가 중요한가_수학이 필요한 순간

수학은 무엇인가? 해당 질문에 대게 '숫자'를 이용하는 학문이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숫자는 수학에서 사용되는 도구일 뿐, 그것이 수학이라 말하기 어렵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문자'를 이용한 학문이라도 대답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초등, 중등, 고등을 거치며 우리는 수학에 목을 맨다. 학교 수업이 부족하여 학원에서 수학을 보충하고 '한국사'보다, '과학'이나 '미술', 심지어는 '국어'보다 수학에 대한 '사교육비' 지출을 더 많이 한다. 다만, 이처럼 엄청난 사교육비를 사용하고 막상 19살이 지나고 나면, 그토록 치열하게 공부했던 수학의 쓰임에 의심을 품는다. 도통 log나 삼각함수, 시그마 혹은 미분적분은 해당 전공자가 아니면 접해 보기 쉽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수학을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피타고라스는 만물을 '수'라고 정의했다. 그냥 추상적으로 '수학'에 미친 사람들에게나 쓰이는 말 처럼 보이는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예술가에게 세상은 예술로 보이고, 음악가에게 세상이 음악으로 보이는 것처럼 수학자에게 세상이 수학으로 보이는 단순한 그들만의 감성인 것일까. 만물이 수학인 이유에는 기하학을 통해 '숫자'가 눈에 보이는 공간에 침투하면서 구체적이게 느껴진다. 내가 눈에 좌표평면 위에 세 점이 잇다. A와 B와 C가 있다. 만약 {A, B}라고 표기하면 점 A와 점 B사이에 선을 긋는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A}, {B}, {C}, {A, B}, {B, C}, {C, A}는 <삼각형>이 된다. 다시 {A}, {B}, {C}, {D}, {A, B},{A, C}, {A, D}, {B, C}, {B, D}, {C, D}, {A, B, D}, {A, C, D}, {B, C, D}, {C, B, D}는 <피라마드>가 된다. 공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컴퓨터'와 같은 기계가 공간을 구현할 수 있는 이유는 비슷한 방식으로 x^ + y^ + z^ = 1이라고 한다면, 이는 지름이 1cm인 '공모양 구'가 된다. 이처럼 수학은 '정의하는 학문'이다. '구'가 무엇인지, '삼각형'이 무엇인지. 수학은 정의하는 학문이다.

 정의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어떤 말이나 사물의 뜻을 분명하게 정하여 밝히는 것" 무엇을 하던 가장 기초가 되야 할 것은 '정의하는 것'이다. "빨간색과 파란색을 석으면 '초록색'이 된다."라는 명제를 '참'으로 정의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빨간색이 무엇인지', 파란색이 무엇인지', '초록색이 무엇인지' 정도는 정의해야 한다. 누구는 바나나의 색깔을 보고 빨간색이라고 부르고, 누구는 하늘의 색을 보며 연두색이라고 부른다면, 애초에 무엇에 무엇을 섞어 무엇이 된다는 논리는 그 누구에게도 성립되지 않는다. 세상 만물을 응용하기 위해 가장 기초되는 것들을 정의하는 것은 '수학'이다. 이처럼 대부분이 반박하기 힘든 정의가 내려지면 절대적 다수들에게 "'명제'가 '참'이다"라고 설득 할 수 있게 된다. 본질을 깨치면, 현상을 이해하기 쉽다. 만약 철수와 영희가 둘이 앉아서 도박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5판의 게임 중 3번을 이기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다만, 철수와 영희가 도박을 하다가 중간에 천재지변에 의해 게임을 못하게 된다면, 판돈 분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이 게임에서 운이 좋게도 철수가 5번 모두 이길 수도 있다. 혹은 5번 모두 질 수도 있다. 그 밖에 철수가 한 번만 이기고 4번을 질 수도 있고, 2번을 이기고 3번을 질 수도 있다. 이렇게 모든 경우를 나열한 것을 수학은 '경우의 수'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모든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와 '해당 일이 일어나는 경우의 수'를 나누면 그것을 '확률'이 된다. 이는 페르마와 파스칼은 이러한 문제를 정의하고자 수학에 확률이라는 분야를 만들었다. 지금은 초등학생도 사용한다는 이 '확률'은 예전에는 '대학자'들이 사용하던 사고 방식이다. 파스칼은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전부 부정하고 싶어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사람들은 그 어떠한 사람도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범주의 것은 부정한다. 세기의 천재 아인슈타인도 죽을 때까지 '양자역학'을 인정하지 못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각보다 많은 난제에 부딪친다. 그것의 대부분은 만질 수 없고, 쉽게 정의되지 않기 때문에 더 난감하다.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두려운 이유는 보이지 않는 외부의 적이 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길을 가더라도 대낮에는 그 공포감을 느끼지 못한다. 결국, 인간이 공포에 휩싸이는 가장 큰 이유는 '불확실성'이다. 불확실성은 '정의'할 때마다 줄어든다. 즉, 고대의 사람들은 떨어지는 유성을 보며 공포심을 느꼈지만, 우리는 그것이 왜 떨어지는지를 알고 있다. 불확실성이 조금 더 줄어든 우리는 고대인이 유성을 볼 때 느끼는 감성과 다른 시각으로 유성을 바라본다. 예전에는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 뒤로 무엇이 펼쳐질지 몰랐고 그 깊이가 어떤지도 몰랐다. 지금의 바다는 '휴양'의 대상이 됐다.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줄여 바다를 '오락'으로 바꿀 수 있다. 미지의 세계를 얼마나 정의하냐는 것은 어두운 밤거리에 불을 밝히는 일이다. 굳이 '아는 것이 힘'이라는 상투적인 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불확실한 것을 조금더 정의하는 것은 중요하다. 비가 오는 날, 일기예보를 살피고 우산을 들고 간다면 그날 맞이하게 될 당황스러운 불행을 하나라도 줄일 수 있다. 수학은 그런 역할을 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수학'을 사용한다. '졸업 후에 쓸데 없다는 수학'이라지만, 우리의 사고는 '함수'나 '확률', '통계' 등을 비롯해 사용한다. 즉 정확하게 무엇을 기억하는지를 떠나, '수학적 사고'를 갖게 된 것이다. 수학은 '답없음'과 '답있음'을 구분할 수 있게 만드는 역할도 하고 있다. 가령 x+y=0이라고 한다면 x와 y에 해당되는 답은 무수하게 많다. 다만 x+1=2라고 한다면 x의 값을 구하는 것은 도전해 볼만하다. 인간은 본래, 값이 있다고 확인된 것을 도전하는 것과 값이 무수하게 많거나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도전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워한다. 단지 그것을 사고 실험을 통해 먼저 확인하고 도전하는 것이 얼마나 일을 수월하게 만드는지 생각해보자면 그렇다.

 

 책은 얇고 쉽게 쓰였지만, 솔직히 읽으면서 '쉽다'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과연 수학이 무엇 때문에 필요하고 무엇이 수학을 만들었는지를 생각해 보기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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