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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Apr 13. 2022

[철학] '공함의 철학'_사랑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네

 모든 것은 본래 부터 '공(空)'하다. '공(空)'하다라는 말은 비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자성(自性)이 없다'는 뜻이다. '자성(自性)'이란 본래부터 갖고 있는 변하지 않는 특징을 의미한다. 어떤 것이라도 존재하긴 하되, 그것은 본래부터 변하지 않는 특성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원래 그러한 것은 없다. 원래 더러운 것은 없고, 원래 깨끗한 것은 없으며, 원래 밝은 것이나 원래 어두운 것도 없다. 모든 것은 본래에 특성을 지니고 태어나지 않고 바라보는 '관찰자'에 의해 정의될 뿐이다. 이는 양자역학의 '관찰자효과(observer offect)'와 닮아 있다. 누군가가 지켜보지 않으면 파동의 형태로 있다가, 관찰자가 관찰하는 순간부터 '입자'가 되는 이유는 '관찰자'가 때문이다. 남산이 남쪽에 있는 이유는 내가 북쪽에 서 있기 때문이지, 그 남산이 본래 남쪽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산이 높은 이유는 내가 산 밑에 있기 때문이지, 산이 본래 높은 것이 아니다. 2500년 전, 세상의 전모 즉, 진리를 깨달은 이(붓다)의 말에 의하면, 모든 것은 '공'하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한자로 적혀 음만 차용하는 이 말이 담고있는 뜻은 이렇다. "물질은 '빈' 것과 다르지 않고, '빈' 것은 물질과 다르지 않다."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모든 것은 파동이면서 입자다.' 파동은 만질 수 없고, 입자는 만질 수 있는 물질이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세상 만물은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비워져 있다.' 물질이라고 말하는 것들도 대부분 '파동-입자 이중성'이며 파동이기도 하고 물질이기도 하다. 세상 모든 것은 그 속이 비어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만질 수 있는 이유는 원자핵 주변으로 99.99%의 텅빈 공간을 사이에 전자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전자가 내 몸을 구성하는 전자와 마이너스 전기의 반발력으로 밀어낼 뿐이다. 이 전자 또한 물질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다. 

 '반야심경'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사리자여! 이 모든 법의 공한 못브은 생기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느니라."

최근 유행하는 가수 '장기하' 님의 '부럽지가 않어'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너한테 십만원이 있고, 나한테 백만원이 있어, 그러면 상당히 너는 내가 부럽겠지... (중략) ... 세상에는 천만원을 가진 놈도 있지. 난 그놈을 부러워 하는 거야."

본래 '부자'와 '빈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천재'와 '바보'도 존재하지 않으며, '키 큰 이'와 '키 작은 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본질은 '공(空)'하다. 본질은 그대로두고 관찰자가 바라보기에 따라 그것에는 의미가 생겨난다. 이는 축구경기와 같다. 경기장에 22명이 뛰고 있다. 만약, 경기의 룰을 모르고 스포츠에 대한 인지가 없는 '외계인'이 이를 본다면 특이한 상황을 볼 것이다. 골대 그물에 공을 넣었더니, 누군가는 즐거워하고 누군가는 실망한다. 생일 선물로 '책'을 준다면, 누군가는 좋아하고 누군가는 싫어한다. '힙합' 음악을 틀어준다면, 누군가는 좋아하고 누군가는 싫어한다. 이처럼 같은 상황을 보더라도 시각이 존재한다. 그것이 좋다. 나쁘다. 따위는 없다. 모든 것은 그저 '공(空)'하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 형체도 없는 것을 '이'라고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 소리도 없는 것을 '희'라고 하며, 만지려고 해도 만져지지 않는 것, 숨겨져 있는 것을 '미'라고 한다. 이 '이','희', '미' 세가지는 따져볼수 없음으로 뒤섞여서 하나로 여긴다. 있는 듯, 없는 듯하여 알수 없는 것. 결국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되돌아간다."

 모든 것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있었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업었다가 있어지기도 한다. 모든 것은 관찰자가 정할 따름이다. 그 관찰자는 우리 주변에만 수 백 명이 있고, 많게는 수 천 명이 되기도 하다. 이처럼 절대적이지 않고 기준점이 수 천, 수 만, 전 인류적으로 80억개나 된다면, 그것은 '값없음'이 된다. '김춘수' 시인의 '꽃'을 되곱씹으면 이런 상대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공(空)'한 상대를 정의하는 것은 관찰자인 '나'의 몫이다. 역시나 '공(空)'한 나를 정의하는 것 또한 관찰자인 '상대'의 몫이다. 우리가 이처럼 상대의 의해서 정의되어 존재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다. 나를 정의해주는 상대에 대한 고마움을 알고, 많은 이들을 '빛'으로 정의해주는 것이 '서로가 빛'이 되는 것이다. 지난주, 아이들과 방문한 관음사의 '카페'에서 "이거 판매하시는 건가요?"라는 물음에, '그냥 가져가시면 됩니다'라고 답했던 인연에 의해 이 글은 나에게 '존재'로 다가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 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일므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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