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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Apr 17. 2022

[환경] 친환경의 모순과 불평등

당신의 쓰레기는 재활용되지 않았다. 독후감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의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 Laurent Lavoisi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고 아무것도 새로 생겨나지 않는다." 물질의 성질이 분자나 원자 구조의 변화로 변화하는 것을 연구하는 '화학'이라는 분야에서의 '친환경'이라는 말은 어떤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인간이 만들어낸 '인위적 화학물'들도 모두 '환경'에서 얻었다고 볼 수 있다. '환경'에 관심은 최근들어 많아졌다. 선진국에서는 친환경 기술 사회를 지향하며 '개발도상국'이 엄두를 낼 수 없는 '성장 전략'을 취한다. 말 그대로 '친환경', '클린 에너지'는 '산업의 한 부류'가 되어 '투자대상'이 됐다. 민간과 공공의 투자는 반드시 성장과 '수익'을 보장해야 한다. 친환경이라는 멋진 프레임에 씌워 있지만 결국 '자본주의'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친환경에는 여러가지 맹점이 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의 대부분은 '도덕적 비판'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환경보다 개발 우선'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언급마처도 분명 지탄의 대상이 된다. 과연 친환경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냄새가 나는 것은 뚜껑을 덮는다' 본질에 대한 고민보다 먼저 현상을 제거 하는 것은 우둔한 일이다. 환경오염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플라스틱 사용'이다.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이 '플라스틱'은 사실상 다수의 인류를 편리하게 만들었다. 이 저렴한 고분자 화합물은 소수의 인류들에게만 주어졌던 편의성을 저렴하게 빈곤한 다수에게 보편화시켰다. 플라스틱에 죄를 물어 플라스틱이 '환경 파괴범'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일본의 속담에 따르면, 냄새가 나는 것은 덮는다. 즉 냄새의 본질을 해결하지 않는다. 플라스틱이 환경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보다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인간과 우리 사회가 가진 속성'이다. 자본주의와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상 '간편하고 경제적인 방식'으로의 진화는 어쩔 수 없다. 우리는 플라스틱을 없애더라도 다른 무언가를 사용할 것이다. 환경 문제에서 우리 인간이 가장 피하고 싶은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플라스틱 사용'이냐 '육류 섭취' 혹은 '석유사용'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구폭발'이다. 산업화 이후에 탄소배출량이 급격하게 늘어난 이유도 환경오염물질을 과도하게 생성해냈던 산업구조의 역할도 있지만 부양해야 할 인구의 폭발적 증가가 원인이었다. 인구 증가는 자본주의를 언제나 밑받침해주는 역할을 했다. 언제나 생산보다 소비가 많아지며 적당한 인플레이션을 발생하면 경제는 긍정적인 지표를 만들어내곤 했다. 머지않아 급격한 인구감소를 보일 일본과 한국 등의 탄소 배출량은 산업 구조 변화가 아니더라도 자연적으로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김상욱 교수 님에 따르면 '친에너지'라 부를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에너지를 쓰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조금더 효율적인 에너지 활용은 있을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쓰지 않는 것이 가장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보다 표면적인 문제 해결을 하려든다. 환경을 위해 원시생활로 돌아가는 것을 누구도 반기지 않는다. 가령 세계 최대 부자 100인이 모여 친환경적 농법을 사용한 식물이나 식물이 아니고선 섭취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든다면 어떨까. 인도나 아프리카에 있는 빈민들의 삶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는 '친환경'의 강요는 과연 맞는 것일까.

 서구에서 사용한 쓰레기들은 대부분 아시아로 수입된다. 아시아의 빈민들은 이것들을 세척하고 분류한다. 베트남에서는 말랑말랑 덜 굳은 녹은 플라스틱을 맨손으로 만지며 커피 한잔 안되는 일당으로 안전을 담보힌다. '친환경', '재활용'이 '선'에 속한다고 여기는 것에 이런 '맹점'이 있다. 살만한 사람들의 일종의 '기호'이자 '컨텐츠'가 되어버린 '친환경'이라는 타이틀에 의해 또다른 불평등과 계층차이가 발생한다. 경제 성장과 환경보존은 불가능하다. 또한 인권과 환경에 대해서도 공존이 힘들다. 원래 인간은 태어나면서 끊임없이 열량소모를 한다. 신체적 소모 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 석탄과 우라늄을 태워 생산 시설을 가동시키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낸다. 이런 열랑 소모에 동참하는 인류의 숫자가 80억이다. 2067년 세계인구는 100억을 돌파할 예정이다. 즉, 현재 사용하는 에너지 수준을 유지만 하더라도 25%이상의 에너지를 더 소비하게 될 예정이고 25%이상의 플라스틱을 더 사용할 예정이다. 상충하는 두 가지 현상을 모두 해결하는 것을 '모순'이라 한다. 인류는 현재 '모순'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렇다고 더 많은 환경파괴와 오염을 방관해서는 안된다. 다만, 자신이 행하고 있는 철학과 사상이 '선'이라고 믿는다 하더라도 상대에게 강요 할 수는 없다. '환경 문제'는 자칫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처럼 공급조절이 옳을 수 있다는 '정치사상'의 문제와 연결될 수 있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그렇다. '환경보존', '친환경'은 소비자의 가치와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 따른 또하나의 비즈니스이고 '환경과 에너지'의 본질이 '재활용'된다는 심적 안도감보다 '덜 사용하는 소비 감소'가 우선되야 할 것이다. 수익성 없는 사업은 '자본주의'에서 퇴화된다. 결국 불필요한 과소비, 특히 일회용 플라스틱 등을 줄이는 것이 더 높은 확률로 환경을 살리는 길일지도 모른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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