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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May 21. 2022

[소설]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가_작별인사

 저자는 이야기 속에 의미를 숨겨 놓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찾아보는 재미는 독자 몫이다. 내가 좋아하는 김영하 작가 님의 소설이다. 숨긴 의미를 찾으려 작정하진 않았으나 '봉준호 감독' 살인의 추억, 마지막 대사처럼 '해석하는 재미'는 무궁무진하다. 왜 책은 '작별인사'가 아니라 '자ㄱ벼ㄹ이ㄴ사'인가. 그냥 읽기 어설픈 이 단어는 '자악벼열이인사'로 읽힌다. 감정없는 '로보트 음성'에 어울리지 않는 감성적인 단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배경지식 없이 들여다보고 대략 열 페이지 정도 넘겨야 알 수 있다. 그냥 씁쓸한 사랑 이야기나 이별 이야기 정도일 거라고 생각하고 서점에서 집어들지 않은 책이었다. 책은 첫 문장부터 두 번째 문장까지 흡입력 있으며, 두 번 째 문장부터 세 번째 문장까지 호기심을 자극하고 세 번째 문장부터 다섯 번째 문장까지 생각거리를 준다. 그리고 그것들이 '쭉~'이어지며 마지막 문장까지 이르게 만든다. 왜 여러 분야의 책을 많이 읽은 작가의 글을 읽어야 하는가.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나 그것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작가의 배경 지식과 인성, 가치관이 투영된다. 속빈 강정처럼 밍밍한 글은 아무리 장황해도 읽기 지루하다. '작별인사'는 얼핏 누구나 생각해왔던 소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다만 그 이야기가 전혀 지루하지 않고 흡입력있는 이유는, 가짜 이야기를 읽어내면서 인문학과 자기계발을 함께 읽게 되는 이유는 '작가'의 것들이 투영되어서다. 지금 이 문장 뒤로 이어지는 말들은 소설의 '스포일러'가 된다. 여기까지 읽고 흥미가 생긴다면 어서 서점으로 가서 책을 구매하고 읽던지 아니면 이 글을 읽은 것을 후회하며 서점으로 가서 책을 읽을 것이다. 만약 이 책을 읽고 싶다면 '내 서평'을 여기까지만 읽고 빠르게 서점에 달려가서 소설을 완독 후에 두 번째 문단을 읽기를 권유한다.

'인공지능'을 보며 인간은 '인간화'되는 인공지능에 두려움을 느낀다. 인공지능이 소설을 쓴다거나, 인공지능이 노래를 부른다거나 하는 기술적인 부분이 점차 인간 공포를 느낀다. 다만 무서운 것은 '인공지능'이 '인간'을 넘어서거나 '휴머노이드'가 '인간'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들을 닮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꽤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야생이었으나 우리는 그들을 길들였다. 바로 '고양이와 개'다. 우리는 그들을 가축화하면서 그들의 성격과 습성은 바뀌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야생의 다른 것들과 다르게 눈 흰자위가 생기기도 하고 몸집이 작아지는 등 변화를 겪었다. 다만 이 변화에 인간도 함께 했다. '고양이와 개'만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니라 '인간' 또한 그들에 맞게 진화했다. 모든 진화는 상호적이다. 뉴턴의 말을 빌리자면 태양이 지구를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태양도 지구를 끌어당기고 지구도 태양을 끌어당긴다고 했다. '만유인력'이라고 부르는 이 '인력'은 물리계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우리 인간과 가축 사이에서도 서로 끌어당김이 있었다. 이 상호인력의 법칙에 중요한 점은 '질량'이 큰 쪽으로 끌려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엄청나게 성숙한 성인들이 '아기화'되는 것을 경험한다. "맘마 먹어야 아야하지 않아!"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다만 이 이야기를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30대 여성이 친구에게 했다고 가정해보자. 얼마나 어색한가. 우리는 상대에 맞춰 간다. '안녕하세요. 빅스비에요', "오.늘.날.씨.알.려.줘.". 조금 어눌한 인공지능의 말에 그보다 더 어눌한 인간이 물음이 이어진다. 우리는 아기에게 맞추는 '엄마'와 같이 '인공지능'에 맞추고 있다고 여기지만 진화의 속도는 매순간 제곱으로 키워나가며 언젠가 진화한 인공지능과 퇴화한 인간만 남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부턴가 '초인류'가 됐다.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눈을 감고 마음 속 이야기를 떠올리면 지구 반대편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떠올리는 '텔레파시(Telepathy)'는 '초능력'이었다. '존재할 수 없을 이 초능력'이 이제는 누구나 가능하다. 우리의 '전달능력(Pathy)'는 5G의 속도로 지구 반대편을 날아가 '이야기'는 물론 '사진'과 '영상'을 전송해버린다. 꿈의 색깔 같은 몽롱하고 흐릿한 모양이 아닌 '깊은 색상', '넓은 시야감', '무한대의 명암비', '잔상없는 화면'의 OLED로 말이다. 그 뿐만 아니라 앉아서 수 백 킬로의 사람과 소통하고 선물을 보내며 돈과 물건을 주고 받는다. '스마트폰과 함께'라는 말만 빼면 이것은 '초능력' 수준이다. 실시간으로 지구 반대편의 이야기를 전달받고 주기도 한다. 잘 때도, 먹을 때도, 씻거나 심지어 대소변을 보는 순간까지 스마트폰은 인간의 몸에 붙어서 인간의 오감에 연결된다. 진동이라는 촉감, 알림이라는 청각, 화면이라는 시각이 모두 스마트폰에 물리적, 비물리적으로 '도킹(결합)'되면 된다. 사실상 스마트폰의 배터리는 인간의 배터리나 다름없다. 스마트폰 배터리에 빨간 불이 붙으면 인간은 스마트폰과 함께 전기선에 연결되어 한참을 이동하지 못한다. 기계가 인간화 되어간다는 세상에 가장 큰 위협중 하나는 떠올려보자면 인간의 기계화다. 우리는 반 정도 기계화되어 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면서 '신'을 버리고 '기계'로 갈아탔다. '산업혁명', '르네상스' 인간을 단합시키는 힘이 '종교'에서 '기계'와 '돈'이 되면서 기계는 곧 신이 됐다. 신을 소유(?)하던 이들이 독식하던 권력이 기계를 '소유'하는 이들이 권력을 독식하는 시대가 되면서 기계가 우리를 지배할까봐 걱정하는 것은 우습다. 우리는 이미 기계이거나 기계에 지배 당하고 있다.

 '선', '달마', '철', '민'는 도가적, 불가적 사상을 의미하는 선과 달마, 기계를 뜻하는 철을 의미한다. 인간다움과 기계다움이 조화롭게 섞여 이름을 짓는다. 인간은 기계처럼 되어가고 기계는 인간처럼 되어간다. 기계스러움이 인간스러움이 되고 인간스러움은 기계스러움이 된다. 인간과 기계는 하나이면서 분리되고 분리되어있으며 하나다. 삶과 죽음은 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가, 만남은 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가. 이는 동양의 음양이론과 비슷하다. 섞이면서 분리되고 분리되면서 섞이는 이 철학이 담겨져 있다. 작가는 작품 속에 의미를 숨겨놓지 않는다고 했으나 등장인물 작명을 위해 인위적으로 작품에 생겨날 인격을 이름을 통해 투영한다. 숨겨놓지 않아도 숨겨진 것을 찾을 수 있고 그것이 재미다. 개인적으로 너무 재밌는 소설이라 주변에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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