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인환 May 22. 2022

[명상] 살인은 나쁜가_내가 말하는 균형이란


 극단적인 예를 들자. "살인은 나쁜가?" 이 물음에 열이면 열이 모두 나쁘다고 대답할 것이다. 확실한가. 임진왜란 이순신 장군은 해상 전쟁 지휘를 했고 이 과정에서 사망한 일본인은 5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는 영웅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살상무기를 떨어뜨렸다. 20만 명이 죽었다. 미국은 2차세계 대전을 종결시킨 국가로 평가 받는다. 최소 백 만의 사람이 희생됐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나폴레옹'의 지휘는 '영웅'으로 묘사된다. 당장 적군이 침투해 국민과 가족을 공격해 올 때, '비윤리'를 따지고 상대를 살인을 하지 않으면 이는 '선'이라 부르기 힘들다. 극단적인 예지만 '살인'조차 양면을 가지고 있다. 자연계에는 애초에 좋고 나쁨이 없다. 그냥 일어날 뿐이다. 자연계에는 '선'과 '악'이 없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가치판단이 들어서기 전까지 모든 것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빛은 좋고 어둠은 나쁘다는 것도 일종의 가치판단이다. '존재'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 그냥 존재할 뿐이다.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은 '역모의 상'이었으나, 역모는 성공적이었고 결국 그는 '왕이 될 상'이 됐다. 어떤 종교를 가지면 좋아진다는 것도 없다. '좋아진다'와 '나빠진다' 또한 가치판단의 영역이다. 어떤 음식이 맛이 좋다는 것도 가치판단의 영역이다. 맛이 좋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맛이 없다는 사람도 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양이를 선물로 준다는 것은 좋은 일이나,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고양이를 선물로 주는 것은 나쁜 일이다. 여기에 고양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저 고양이일 뿐이다. 종교는 그대로를 받아드리는 과정이지, 좋아지거나 나빠지거나를 관장하지 않는다.



 물중독 환자에게 물을 주는 것은 '독'이지만, 탈수 증세 환자에게 물을 주는 것은 '약'이다. 물은 '약'도 '독'도 아니다. 큰 돈을 버는 것은 행운이지만 어떤 시기에 큰 돈 벌어 사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불행이 되기도 한다. 모든 것에는 '가치판단'이 들어간다. 가치판단은 주관적이며 임의적이고 비과학적이며 상대적이다. 상황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고 시간에 따라서도 달라지며 공간에 따라서 또한 달라진다. 댄스 음악은 공연장에서는 '선'에 속하고 '장례식장'에서는 그러지 않다. 빨간색은 정렬을 상징하지만 다시 어딘가에선 공포를 상징한다. 댄스음악은 선도 악도 아니며 빨간색은 공포도 정렬도 아니다.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다. '나'는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며 '선'도 '악'도 아니고 불행한 사람도 행복한 사람도 아니다. 그 또한 가치판단에 의해 의미가 부여될 뿐이다. '상대'도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고, '선'도 '악'도 아니다.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그 자체로 키가 작거나 못생기지도 않고 게으르거나 못되지도 않았다. 모든 것은 가치 판단에 의해 결정되다. 10cm의 잣대로 재기에 경복궁은 어마무시하게 크기지만 명왕성을 기준으로 잴 때는 허무맹랑하게 작다. 경복궁은 크지도 작지도 않다. 그저 경복궁일 뿐이다. 뉴스에 나오는 누군가가 말하는 '처 죽일 놈'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가치판단에 의해 결정된다. 가치판단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가치판단은 오락가락 하며 모호한 성격이다. 눈을 감고 마음속에 기준 선만 바꿔치기 하면 언제든지 달라진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보기에 따라 우주 전체가 티끌이 되기도 하고 무한히 광활해지기도 한다. 우주를 광활하게 혹은 티끌처럼 만드는 외부세계에 존재하지 않고 마음속에 있다. 그것은 '관념'일 뿐이고 '수행'과 '훈련'으로 언제든 바꿔낼 수 있다.



 좋은 일에도 나쁜 점이 있고 나쁜 일에도 좋은 점이 있다. 애초에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없으며 그러기에 좋은 점과 나쁜 점도 없다. 눈에 보이는 '빨간색' 지붕은 고양이의 눈에는 '초록색'이다. 색깔도 인식하는 개인 마다 상대적인 이다. 내가 보이는 것이 상대에게 보이지 않을 수 있고 상대가 보이는 것이 내가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며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단지 그럴 뿐이다. '기독교'가 옳다. '불교'가 옳다. '이슬람교'가 옳다는 것은 없고 '좌파'가 옳다. '우파'가 옳다는 것도 없으며, 민주주의가 옳다. 사회주의가 옳다는 것도 없다. 다만 거기에는 양면이 모두 존재할 뿐이다. '우주'에는 '오른쪽', '왼쪽'이 없다. 오른쪽도 내가 뒤만 돌면 왼쪽이 되고 왼쪽도 뒤만돌면 오른쪽이 된다. 절대적인 것이라곤 '절대적인 것이 없다'라는 사실 뿐이며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진리'라고 부른다. 스스로 정하는 가치판단을 지우는 작업을 불교에는 '해탈'이라고 부른다. 스스로를 올가매는 속박에서 벗어나 '진리'를 알게 되면 '우주'를 티끌로 만들기도 하고 새우주를 창조하기도 한다. 우주를 창조하는 것은 '창조주'와 같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며 여기에는 나와 절대자도 포함된다. 유일신을 강조하지 않아도 이미 모든 것은 하나다. 지구에 있는 원소 단위가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 '내'가 되기도 하고 '컴퓨터'가 되기도 하며 '쓰레기'가 되기도 한다. 사실 배열의 문제일뿐 애초 우주의 원소의 갯수는 단 하나도 바뀐바 없으며 그 순서만 달라질 뿐이다.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증기가 되도 그 분자는 H2O로 같듯, 본질은 하나다. 둥근 컵에 담아도 네모난 컵에 담아도 이미 물은 물이듯 애초에 그것으로 완전하다. 모든 것은 태초에 하나며 형태가 이렇게되고 저렇게 되는 것은 그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곧 내 안에 있으며 언제든 훈련에 의해 갈고 닦을 수 있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을 오른 쪽으로 옮겨봐야 내가 뒤만 돌면 다시 모든 것은 왼쪽에 서 있을 뿐이다. 



 호흡을 하면 숨은 들어오고 나간다. 들어오고 나가는 와중 파도치는 생각과 감정은 머무르지 않고 시간을 다르게 들어왔다 나간다. 3년 전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화가 지금도 머물지 않고, 5년 전 기뻤던 감정이 지금도 한결 같지 않다. 모든 감정과 상황은 머무르지 않고 스치고 지나간다. 그것을 붙잡지 않고 바라본다. 그것이 영원하지 않음을 인식한다. 그것을 붙잡고 있다면 가치판단이 그 극단에 맞춰지게 되고 그것이 진리라는 착각에 빠진다. 모든 것은 한번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처럼 머물지 않고 들어왔다 나간다. 절대적일 것이라 여기는 거의 웬만한 모든 것은 머물지 않고 지나간다. 절대적인 것이란 건 없다. 오늘의 정답이 내일의 오답이 되고 오늘의 오답이 내일의 정답이 되기도 한다. 그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붙잡지 않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가치판단에 해방될 수 있고 자유로워진다.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 상관은 없으나 단지 그것이 여러 형태로 불려진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종교의 이름을 붙이든, 사상이나 철학의 이름을 붙이든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으며 그저 그것으로 존재한다. 모든 것은 그저 그것으로 존재한다. 



작가의 이전글 [소설]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가_작별인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