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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May 26. 2022

[수필] 제주 의귀리의 4월 3일_나는 슬픈 아이여수다


 글감 첨부를 하려니 도서 내용이 검색되지 않는다. 바코드를 살폈더니 없다. 가격도 적혀 있지 않다. 다시 살펴보니 '비매품'이다. 비매품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의미를 다시 곱씹어본다. '많이 팔 필요없습니다', '팔 생각 없습니다'. 무언의 메시지를 알고 이 책이 담은 순수한 메시지가 부족한 글이나마 알려지기를 바란다. 비록 서점을 비롯해 이 책을 구할 수는 없겠지만 나 역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따위의 글을 적을 필요도 없어 홀가분하다. 책의 시작은 '의귀리'라는 작은 마을에 대한 소개로 시작한다. 의귀리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다. 예순일흔 어르신들은 '의귀리'보다 '오끼'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마을 이름의 어원에 대해 어른들께 여쭤 본 적은 없으나, 어른들은 예로부터 '옷'이 귀한 마을이라 '옷귀'라고 불렀다고 했다. 아마 이 말의 한자가 '의귀'가 된 모양이다. 의귀는 제주 남쪽바다를 끼고 있는 '남원'이라는 마을에서 산 쪽으로 올라가는 중턱에 있다. 1894년부터 1926년까지 지역문화와 산업의 중심지였다. 그 시대 마을사람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많이 갔다. 시대적 상황과 배경에 따라 이 지역 사람들은 민족의식이나 개화사상을 갖추고 있었다. 남원, 효돈 등과 더불어 볕이 잘 드는 남쪽 제주라는 특색에 맞게 현재 이 지역의 대부분은 '감귤밭'이다. 지금에서야 조용한 시골 마을인 이곳도 4월 3일 사건 뒤로 7개월 간, '단 한 명'도 사람이 살지 않던 '텅 빈 마을'이었다. 지금의 마을은 4.3 사건 후 마을을 재건한 모습으로 사실상 4.3 사건에 이 마을은 모두 불 타 전소했다. 제주의 마을 중 피해가 컸던 지역으로 알려진 내 고장의 역사를 '고작' 서평단 신청 계기로 알게 됐다는 것에 부끄러움이 느낀다. 



 1948년 11월 7일에는 느닺없이 토벌대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방화하고 학살했다. 숨어 있던 마을 사람들은 발각되는 즉시 총살됐다. 1949년 1월 10일과 11일 이틀간 의귀국민학교에 수용된 주민들은 무차별 고문을 당하고 20명이 학살됐다. 전소한 마을을 다시 찾아온 마을주민들은 나무 기둥을 세우고 나뭇가지로 비바람을 막아 겨우 축성작업을 시작했으나, 지금도 '웃물통'과 '동산가름'이라는 동네는 복구되지 못했다. 작은 마을에서만 4.3은 느닺없이 찾아오고 250명의 인명사고(사망, 행방불명, 피해)를 만들었다. 농토는 황무지가 되고 마을의 주산업이었던 축산업은 초토화됐다. 지금은 마을이었던 자리 위로 감귤밭이 터를 대신하고 있다. 느닺없이 들어닥친 군인은 겁에 질린 오누이를 봤다. 농사 짓는 낫을 보고 군인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이냐?" 아버지는 '야초 베는 기구입니다.'라고 답했고 군인은 '거짓말!!'이라고 소리치며 그자리에서 조부모와 어버지에게 총을 쐈다. 고기정 할아버지의 어린 기억에 '군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한날 한시에 여러 집에서 장례가 치뤄지는 마을, '탕탕탕'의 소리에 사람의 숨이 끊어진다. 밟지 않은 하얀 눈이 사람 서른 명 즈음이 흘린 피로 녹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는 그렇게 돌아가셨고 세 살 된 동생도 곧 이어 떠났다. 그 뒤로 가족없는 시절을 보낸 고통의 시간은 무엇으로 보상이 가능한가. 모르는 사람 하나가 죽어가는 모습을 봐도 정신적 충격을 겪는 세상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눈 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으로 보는 어린 아이의 심정은 어떤가. 그리고 그 기억에 이어 가족없는 더 무서운 현실을 맞이해야 하는 일은 또 어떤가



 김병수 할아버지의 기억은 '여섯 살'에서 시작한다. 도로변을 나가신 여섯 살 아이는 어머니와 중년 아주머니를 마주친다. 그녀는 '해방'이 됐다고 말했다. 해방을 맞이한 할아버지는 그것의 기쁨에 대해 이해하기도 전, 2학년에 학교가 폐쇄되고 집이 불에타는 것을 경험한다. 먹을 것은 물론이고 입을 것과 신일 것이 없는 그 날은 '절정'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할머니 상중에 상복만 입은 채 피신한 가족은 돌아왔을 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숨바꼭질처럼 숨어지내다 술래에게 걸리면 체포되거나 고문당하고 살상됐다. '탕탕탕' 소리가 나면 어김없이 아는 청년 누군가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짹' 하는 새소리에도 '윙'하는 바람 소리에도 공포는 떠올랐다. 끔찍한 4월 3일의 기억이 마무리 될 쯤, 상처가 아물기도 전, 6월 25일이 됐다. 형님을 비롯해 가족들은 다시 산지항을 통해 배에 실려 갔다. 학살 이후 전쟁, 그것은 이후 세대에게는 종이 위의 '역사'지만 누군가에게는 눈 앞에 훤한 과거 기억이다. 김양수 할머니의 기억에 한 번에 두 사람이 한 시간씩 교대로 보초를 섰다고 했다. 초가로 지어진 제주의 집은 군인이 당긴 불에 빠르게 타버렸다. 옆 집에 놓은 불은 제주의 바람을 타고 이 집 저집에도 옮겨 붙었다. 모든 게 불에 타서 신발은 물론 옷도 없던 그 시절, 무너진 마을 재건을 위해 사람들은 다시 성담을 쌓고 집을 올렸다. 서너평 고작인 집에는 이불은 물론 먹을 것과 입을 것도 없었다. 가을에 농사 짓은 음식을 먹으려 해도 담을 그릇이 없는 시절에는 그저 손으로 떼어다가 먹었다. 양성민 할아버지의 기억에서도 역시나 가장 오래 남는 소리는 '탕탕탕'이었다. 그 소리가 나면 오늘은 누가 저세상으로 갔을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남자일지, 여자일지, 몇 명일지. 할아버지는 그 날 천지신명에게 이 땅에 다시는 이런 일이 이러나지 않도록 빌었다고 한다. 평화의 상징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았다.



 양인필 할아버지는 주변 마을인 '의귀, 수망, 한남'이 한꺼번에 불에타 연기가 치솟는 장면을 봤다. 오양수 할머니의 기억에 '아버지와 헤어진 날'은 이렇다. 순경이 오는지 잠시 보러 가시던 아버지의 뒷모습 뒤로 10분이 흐르고 소리가 났다. '탕탕탕탕탕탕탕탕탕...'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기억이다. 현재현 할아버지의 기억의 마을은 '형님 동생'하며 지내는 살가운 친구, '아주망, 삼춘'하고 부르던 이웃들 대문도 없이 정낭으로 부재를 알리던 평온한 곳이다. 그 뒤로부터 난데없는 '우익'과 '좌익'이라는 말이 들어오고 죽창을 들고 서로를 겨누는 믿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군인들이 지른 불에 입고 있는 옷만 겨우 건지고 나온 이 마을에게 옷은 귀했다. 왜 이런 이름을 갖게 됐는가. 죽은 이의 시체를 보고도 통곡 소리 조차 내지 못하는 생활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부모 형제를 눈 앞에서 잃고도 살기 위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뛰어야 하는 심정은 오죽하는가. 초등학생 막 벗어날 나이. 집에 들어온 군인은 총을 들고 있었다. 잠시 들리고 나갔던 군인셋. 방문은 짧았으나 이 짧은 순간으로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세상을 등졌다. 지금은 꽤 믿기 힘든 말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영화나 소설도 아닌 것이 더 믿기 힘들다. 실제로 사용되는 경우는 많이 없지만 종종 '육지것들'이라는 말이 어른들 입에게서 들려오던 시기가 있었다. 사상이나 정치에 문외한 사람들의 눈에 육지에서 온 이들은 평화스럽던 마을에 갑자기 불을 놓고 총을 쏴대는 이해불가한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곳과 얼마 벗어난 곳, 지금은 관광객들이 멋들어진 렌터카를 타서 뚜껑열고 자유를 만끽하는 마을 곳곳에는 이런 일들이 있었다. 씁쓸하고 마음이 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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