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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Jun 03. 2022

[읽을책] 모호해도 좋다_본질의 중요성#11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본질'이라는 단어에 굉장히 기민해진다. 본질없는 행위가 몹시 불편해진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올 김용옥 작가 님이 말씀하신 해석에 따르면 '그것을 정의하는 순간, 그것의 본질은 훼손된다.' '사랑하다'라는 말이 담고 있는 '개념'은 우리 모두가 일반화한 관념이다. '사랑하다'의 말 뜻에는 '얼굴이 붉어짐', '가슴이 콩닥거림'이나 '맥박수 증가', '도파민 분비'와 같이 여러가지 현상이 있다. 그것에 대해 '사랑한다'라고 정의하는 순간 '본질'은 사라지고 '관념'만 남는다. 우리 인간은 일반화하기를 좋아한다. '사랑'이란 원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다. 그 복잡한 인간의 감정마저 '관념'으로 정의하고나면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 된다. 마치 공장에서 철학없이 대량생산된 가공품처럼 쉽게 쓰고 쉽게 버려지는 일회용이 돼버린다. '정체성'은  굉장히 복합적이고 초관념적이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당신은 여성일 수도 있고, 남성일 수도 있다. 10대일 수도 있고 2~30대, 혹은 4,50대 일수도 있고 그 이상일 수도 있다. 당신은 어머니일 수도 있고 딸일 수도 있으며 아버지일수도 있고 아들일 수도 있다. 당신의 직업은 선생님일 수도 있고 작가일 수도 있으며, 의사일 수도 있다. 세상에는 인간의 언어와 관념에 가둬두지 못할 초월적인 '본질'이 있다. 관념의 뒤에 숨으면 우리는 본질을 숨길 수 있다. 어린시절 타인에 의해 정해진 '이름' 뒤에 숨거나, 성별 혹은 국적 뒤에 숨을 수도 있고 나이나 직업 뒤에 숨을 수도 있다. 본질을 잊는 행위는 어느 순간 중요하게 작동하기도 하나, 그것이 과하면 '자신'을 잃는다. 우리는 '삶'이란 굉장히 고귀하고 숭고하다고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 삶은 그냥 삶일 뿐이며, '인생'이나 '삶', '성공' 등도 그것을 정의하는 순간 진짜가 모두 사라져 버리는 싸구려 일회용품이 된다.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My story'라는 노래 가사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바람을 볼 순 없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어. 어디로 향하는지. 마음을 볼 순 없지만, 누구나 알수가 있어. 무엇을 원하는지.'

 바람이 어디에서 출발했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우리는 관념적인 해석에 따라 정할 수 있다. '동남쪽'이라던지, '북서쪽'이라던지... 다만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무엇을 바람으로 정해야하는지, 동남쪽이란 어떻게 정의 할 수 있는지. 몇도부터 몇도까지를 동남쪽이라고 정의할 것인지. 수많은 기체 분자들 중 이동하는 분자는 백분율로 얼마나 정의 할 것인지. 우리는 과연 구별할 수 있나. 방향과 속도는 무엇으로 규정할 것이며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제자리에서 무수하게 떨리는 수많은 전자의 움직임도 미세한 움직임으로 봐야하는 걸까. 그리스 신화에는 역설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바로 '테세우스의 배'다. 가령 어떤 배를 유지 보수한다고 했을 때, 그 배의 모든 부분이 교체 된다면, '그 배'는 과연 여전히 '그 배'인가? 아테네인들은 테세우스를 기리기 위해서 그가 탔던 배를 델로스 섬까지 가져왔다. 다만 세월이 지나 수백년이 흐르고 계속해서 배의 부품을 새로 교환하다보니 결국에는 '테세우스의 배'라는 이름을 제외한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이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인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그것'이라 규정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것의 규정이 모호하다면 본말은 전도되어 결국 '이름'만 남는 것이 아닌가. 삶에는 정의 내리기 모호한 관념들이 무수하게 많다. 누가 물었다. '부자'는 무엇인가. 2021년 11월 15일 중앙일보에 KB금융지주의 '2021년 한국의 부자 분석'이 실린 적 있다. 여기에 따르면 부자의 기준은 총자산이 100억 원 이상으로 년 소득이 최소 3억 원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산이 99억 9999만 9999원인 사람은 부자가 아니고 100억인 사람은 부자인가. 월 소득 2억9999만9999원은 부자가 아니고 3억은 부자인가.

 사람들은 '딱'하고 떨어지는 것을 좋아한다. 2를 2로 나누면 정확히 1로 떨어지는 수학적 관념을 좋아한다. 다만 자연계에 '정확히 떨어진다'라는 것은 없다. 자연은 원래 모호하다. 아주 오랫동안 지동설이 천동설을 넘어서지 못했던 이유는 행성들이 모두 정확한 '원형 궤도'를 돌고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다만 실제 행성은 타원 궤도를 돌고 있었고 케플러의 이런 발견은 이제 놀랍지도 않은 상식이다. 고대인들에게 하늘은 '신'이 였다. '신'에게 오차나 우연 따위는 존재할 수 없었다. 정확하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무언가를 신에게 기대했던 이들은 인간 세계인 '땅'과 다르게 '하늘' 만큼은 '딱' 떨어지리라 믿었다. 다만 인간이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를 더 관찰하면 관찰할수록 세상은 모호함 덩어리였다. 규칙적인 역학이 존재해야 할 '물리학'에서 '미시세계'는 확률로 그 존재를 결정하고 있었고 우주는 더욱이 '무한'이라는 애매모호한 숫자로 인간을 실망시켰다. 피타고라스는 '무리수'라는 존재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인간은 알면 알수록 '자연수'에서 '0'을 발견하고 유리수와 무리수를 발견하고 '허수'를 발견하는 등, 뭔가 떨어지지 않는 것 수들을 발견했다. 수학조차 정확히 떨어지지 않음을 인정하고 뉴턴이 미적분을 발견하면서 '딱' 떨어지지 않고 무한대로 수렴하는 이상한 관념까지 우리는 받아들이게 됐다. 스타워즈의 요다는 말했다. 'Do or Do not, there is no try(한다. 안한다만 있을 뿐, 해본다는 건 없다). 스타워즈 제작진에 따르면 요다는 '아인슈타인'의 형상을 모태로 삼았다. 끝까지 양자역학을 인정하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처럼 요다는 모호함, 중첩, 이중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알면 알수록 삶은 모호함 투성이고 불활실성 투성이다. 그것을 관념으로 끄집어 내지 못했다고 해서 본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관념으로 끄집어 낸다는 것이 본질을 위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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