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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Jun 05. 2022

[철학] 내 아이에게 단 한 권만 가르쳐야 한다면...

노자 '도덕경' 독후감


세계적인 투자자 워렌 버핏(Warren Buffet)과의 점심 식사 경매가 456만 달러(56억 원)에 낙찰 된 적 있다. 2019년 중국 암호화폐인 트론을 개발한 '저스틴 선(Justin Sun)'이 낙찰됐다. 짧은 점심식사 동안 사람들은 그에게서 투자의 기준과 철학을 배울 수 있다고 여겼다. 큰 돈을 내고 점심식사를 한 이들의 공통점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였다. 워렌버핏은 자신의 투자에 대한 철학과 소신을 숨기지 않고 말하곤 했다. 그의 이름으로 집필한 저서는 없으나 그가 어떤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는 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와 식사를 하고 싶은 이들은 투자 종목이 아니라, 그보다 깊은 본질을 궁금해 했다. 황금알이 아니라 황금알을 낳는 오리에 호기심을 가졌다. 그들은 '철학'을 물었다. '어떤 종목을 살까요?'가 아니라 '철학'을 묻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깊고 깊은 본질을 따지고 들면 결국은 '철학'을 만난다. 세속적인 '부자'에게는 가난한 '철학자'와 결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사색에 빠져 있는 '철학자'는 고귀하고 '부자' 다른 부류라고 여기는 듯 하다. 따지고 보자면 그들의 차이는 크지 않다. '부'를 움직이는 이들은 대게 '독서'를 좋아하고 '사색'을 좋아하며, 여러 종류의 언어를 공부한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재벌들의 경우 대부분 '명문대 출신'들이며 그들의 대부분은 '경영학'이 아닌 '인문학'을 공부했다. 즉, 우리는 '부자'에게서 '돈 버는 법'이 아닌 '근본' 즉, '본질'을 배워야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재벌'들이 탐욕스럽고 표독한 인물로 그려지나 이들의 대부분은 학창시절 모범생 축에 속했고 나름 무난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놀랍게도 그들은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공통된 성향이 있다. 어쩌면 '부자'란 행동하는 '철학자'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동서양에서 '노자', '공자', '스피노자' 등 철학자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대부분 밥벌이와 상관없이 심오한 생각만 한 사람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이들이 현대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들은 무엇을 '업'으로 택하고 있을까? 오늘날 우리와 그들이 사는 세상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편견없이 바라본다. 만약 '공자'가 '정치컨설팅 업체' 대표로 여의도에서 '국정', '정책', '선거'에 자문하는 대표라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스피노자'는 '안경 및 렌즈 제조업자'로 당시 '안경과 렌즈 깎는 일은 '첨단 직업'이다. '스피노자'는 오늘로 치지면 '반도체 업체 대표' 쯤 될 것이다. '탈레스'를 '투자 전문 회사' 및 '보험사' 대표라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실제 그들은 그 시대에도 '업'을 가졌다. 예전에 연예계에서 '신비주의'라는 컨셉이 있었다. 그들은 TV에 출연하지 않고 음악이나 영화와 같은 작품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사생활은 철저하게 가려져서 많은 이들이 그들을 '신격화'하기도 했다. 그들에 대해 잘 모를 때, 우리는 환상을 갖는다. 마가복음 6장 4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리라.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칠 뿐이다." 고다마 싯다르타의 아버지, 정반왕 또한 아들의 출가를 막기 위해 온갖 쾌락을 제공 했다. 붓다의 아들 라훌라는 걸식하는 아버지를 부끄러워 했다. 가까운 이들일수록 그 진가를 바라보기 힘들다. 그래도 어느정도 배경이 드러난 '공자'에 비해 '노자'는 정말이지 너무 신비 스럽다. 노자는 출생과 사망 시기를 모르고 무슨 일을 했고 뭘 했는 도통 알려진 바가 없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겨우 추론할 수 있는 것이 '초나라' 출신이라는 점과 주나라에서 도서관장을 했다는 정도다. 이또한 확실치 않다. 그가 실존 인물인지 조차 알 길이 없다.


그는 소를 타고 함곡관 밖으로 나가며 문지기에게 5,170자로 된 얇은 책을 전달했는데, 그것이 '도덕경'이다. '도덕경'은 '도경'과 '덕경'으로 나눠져 있는데, '도란 무엇인가', '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상당히 포괄적이고 모호하게 적혀 있다. 총 80장으로 된 생각보다 짧다면 짧고 깊다면 깊은 이 책은 표면을 훑으면 소주잔 수준이지만 그 깊이 사색하게 읽으면 태평양보다 깊다. 고서에는 쉽게 '-전(-傳), -학(-學), -어(-語), -서(-書), -론(-論), -경(-經)'으로 끝나는 책들이 많은데, '전'은 해석과 전달이 목적이고, '학'은 가르침이 목적이고, '어'는 '말을 기록'함이 목적이고, '론'은 '설명'이 목적이며, '경'은 그저 '원문'을 이야기한다. 즉, 성경이나 불경, 사서삼경처럼 해석의 여지를 작가에게 주는 쓰기 기법이다. '도덕경'은 우리가 종교로 잘못 받아드리는 '도'와 윤리에 대한 '덕'을 이야기 함이 아니라, 우주와 인간의 섭리를 이야기 한 책인데, 해석하는 이들마다 방식이 각자 달라 여러 가지 의미로 전달되곤 한다.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다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는 1장에 들어가며 나머지 장을 모두 포용한다. 우주를 'Space'라고 규정하면 거기에는 '공간'만 있고 '시간'이 없으며, Universe라고 규정하면 '비물질'을 포함할 수 없듯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본질은 사라지고 표면적 '관념'만 남게 되는데 고로 '도'는 말로써 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 본질이다. '도'는 언어로 규정할 수 없고 모든 것의 본질과 흐름, 원리라고 관념적으로 해석해 본다. 이또한 언어로 규정했음으로 '도'는 아니다. '노자'가 지었다는 '도덕경'은 애초에 이름이 아니라 '노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노자'의 모호함과 포용성을 생각해보자면 그는 누구이며 어떤 생각을 하여 이런 넓은 포용성있는 글을 썼는지 궁금해 견딜 수 없다.


5,170자로 된 노자는 한자, 영어, 한국어는 물론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있고 그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여 그것이 여러가지로 사용된다. 고로 '노자' 하나만으로도 언어, 철학, 경제, 역사를 모두 가르칠 수 있다. 만약 우리 아이에게 죽을 때까지 단 한 권의 책만 가르쳐야 한다면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노자'를 선택하겠다. 이처럼 깊고 넓은 이야기를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현존한 모든 언어를 사용해서 0.1%라도 전달할 수 있으면 더할나위 없다고 생각한다. 살다보면 잘 모를때 더 깊어 보이는 경우가 있다. 잘 모르기 때문에 깊게 생각할 수 있는 거라면 오히려 그를 모르는 것이 다행일 수도 있다. 어쨌건 그에 대한 무궁한 호기심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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