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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Jun 30. 2022

[소설]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고 명작_편지

 살인죄. 배상할 방법도 없고 당사자와 합의도 불가능하다. 중죄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죄 중 가장 잔혹한 범죄 중 하나다. 떠한 인간적 이해도 불가능 할 것 같은 이 '살인'이라는 소재에 '인간적임'을 녹인다. 아이러니하지만, 살인 또한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고 '악'으로 분류되지만 마치 '인간'의 역할을 넘어섰다고 볼 수는 없다. 에서 적지 않게 존재하는 일이다. 첫 글만 보고서 '살인'을 옹호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자. 한 해 4800명의 목숨이 교통사고로 죽는다. 하루 13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데 연간 음주운전 적발자 수는 대략 30만명이 넘는다. 또한 음주운전 재범률도 41.7%다. 3회 이상 적발된 경우도 15.6%나 된다. '살인'은 이름 만큼이나 무시 무시하지만 실제로 누구의 죄목이 될 수도 있고 살해 당사자가 될 수도 있다. 대한민국 버스 1만대당 34.57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영국이 0.63명, 독일이 1.31명인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나라의 버스회사 감독관리 실패로 인한 교통사고 사망자는 엄청나게 많은 편이다. 직접 흉기를 들고 작정하고 누군가를 살해하는 경우도 분명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해마다 69건의 존속살인이 발생한다. 존속살인이란 자기나 배우자의 직계 가족을 죽이는 일을 말한다. 이 말은 대한민국에서 5일에 한 명은 자기 혹은 배우자의 직계 가족을 죽인다는 것을 말하고, 반대로 누군가는 가족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살인을 '우리 삶'과 떼어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깨끗하다'고 눈가리고 아웅하고 싶지만 인간이 살면서 인간에 의한 생각보다 흔한 일이 '살인'이기도 하다. 살인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통계'가 그렇다.

 내가 누군가를 죽이거나, 누군가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는 것을 보통 사람은 생각해 보지도 않는다. 실제로 확률로 보더라도 그닥 높지는 않다. 다만 이것을 직계가족 4인으로 둘 때, 우리 가족 중에 해당 범죄에 관련될 확률은 4배나 늘어난다. 심지어 '조카'나 '사촌',  매형, 매부, 매제, 형부, 제부, 처형, 처제 등 가족의 단위를 한 단계 확장하면 이는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현실에서 겪을 인간사로 분류하지 않을 수 없을 지경이다. 살인자의 '가족'. 뉴스를 통해 우리는 '처죽일 놈'들을 만난다.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중범죄자들이지만 단순히 텍스트로 그들의 범죄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이를 살펴보면 역시나 사람 사는 인간사 중 하나 일지도 모른다고 여겨진다. 아는 지인이 '법'적인 문제로 법원에 갔던 적 있다. 법이 판단한 그의 문제는 '유죄'였다. 대략의 인간적인 대화를 통해 앞뒤 상황을 들어보면 물론 '죄'를 짓긴 했지만 인간적인 이해가 가능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다만 문서상, 글자로 남겨진 그의 죄는 '인간미와 표정 없는 악마'처럼 그려졌다. 그 문서의 진위는 대략 비슷한 듯 했다. 다만 그 것을 법리적 판단을 위한 진술과 증거로 나열해 놓으면 거기에는 '인간미'가 사라진다. 가까운 친구가 '폭행죄'로 합의를 한 적 있다. 친구의 진술에 따르면 술을 마시다가 옆 자리와 시비가 생겼다고 했다. 이 시비로 친구는 말다툼을 하게 됐고 상대는 "돈 많으면 쳐봐"라는 이야기에 가슴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상대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며 타박상이 생겼고 이 사건으로 200만원의 합의금을 요구 받았다. 분명 친구는 잘못했으나 문서상 죄에 대한 서술은 무시 무시했다. 상대는 이 폭행으로 생활이 곤경할 만큼의 문제가 생겼고 범행에 대한 충격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다고 했다. 끝까지 씩씩 거리던 친구 녀석은 결국 상대가 요구한 합의의 내용에 응했다. 

살면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다만 우리가 '감옥'이 아니라 '교정본부'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것이 '교화'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불용'을 원칙으로 죄를 보는 것 또한 '자신은 어떤 죄에 연루되지 않을 자신이 있다'라는 어리석음일지도 모르다. 적지 않을 확률로 오늘도 누군가는 죄인이 되고 죄인의 가족이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편지'를 보기 전 까지, 나의 세상에서 '범죄'는 '나쁜 것', '불용하여 마땅한 것'이었다. '피해자의 시선'에서 어떠한 용서도 받을 수 없는 것이었고 특히나 '살인죄'는 더 더욱 그렇다. 살인자의 가족은 '웃지도, 사회생활을 하지도, 떳떳해서도 안 될' 존재라고 생각했다. 편지 '소설'은 그 틈을 파고들어 생각할 거리를 줬다. 추리소설을 쓰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던지 이 생각할 거리에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채로 바꿨다. 모든 면에는 양면이 있다. 심지어 불용이 마땅한 살인죄와 그의 가족에도 일말의 생각할만한 빈틈이 존재해야 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 중 '공지영' 작가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있다. 사람을 죽인 이를 미화시킨다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과 영화를 재밌게 봤다. 어떤 버스 운전기사는 운전 중 졸음으로 수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자가 됐다. 변호사를 선임하자, 사람을 죽이고도 수감일수를 줄이려고 변호사를 사냐고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죄'라는 것이 '악마'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외면할 수도 포용할 수 없는 이런 인간사의 아이러니는 앞으로 인간이 얼마나 문명적으로 발전하는지와 상관없이 꾸준하게 있을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책 처럼, 우리는 꾸준하게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으로 분류되는 가치관의 싸움을 만나게 될 것이다. 사람마다 만들어 놓은 그 가치관이 꾸준하게 대립하겠지만 어느 쪽이 맞다고 결론을 짓기 전에,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다는 시선 확장이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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