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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이태백과 닐 암스트롱은 같은 달을 봤을까?

by 오인환


우리는 스스로의 행동을 과장스럽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우연히 지인의 카메라의 찍힌 내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어떤 상황이 생겼을 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드리는 과정에서 객관적인 사실 뿐만아니라, 당시의 감정이나, 주관적인 경험들로 인해 복합적인 결과물을 기억에 저장한다. 따라서 자신이 어떻게 보이고 있는지와 실제로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판이하다. 그렇다. 모든 습관은 굉장한 의식, 반복 그리고 무의식의 순으로 넘어간다. 운전을 예를들어보자. 처음 운전할 때는 모든 행위에 신경을 곤두 세운다. 운전대를 잡는다. 후방을 살핀다. 핸들을 조작하는 한다. 패달을 밟는다. 한번에 처리해야할 업무가 많아진다. 초보라는 과정을 누구나 거치고 숙련자가 된다. 어느 경지에 이르면 음악을 들으면서 운전이 가능하고 심지어 운전 중에 딴 생각도 할 수 있다. 익숙해진 무언가는 무의식이 담당한다. 무의식이 일을 하면 의식은 손이 허전해진다. 자신의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쓸 수 있다. 모든 연습, 습관, 훈련은 의식을 무의식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사람에게 가장 무의식화가 잘 된 훈련은 말하기, 듣기, 걷기 등이 있다. 어떤 언어를 처음 접할때 우리는 한 단어, 한 발음을 신경 곤두세워 집중한다. 그러다 어느정도 후면, 일정 부분을 무의식으로 넘겨 버린다. 새롭지 않은 정보는 '자동 장치'에게 맡긴다. 의식은 새로운 정보만 집중한다. 사람은 말할 때, '무의식'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말'의 범주가 무의식으로 넘어갔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얼마나 많은 반복이 있었기에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말을 할까. 별거 아닌 짧은 단어는 많은 것을 함축한다. 실제 두께가 별로 두껍지 않은 '고압축렌즈'는 사실상 엄청나게 '왜곡'된 사물을 보인다. 우리가 스스로 행동을 과장스럽게 기억하는 이유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의미부여를 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습관으로 '왜곡'된 시선을 갖는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관계'는 없다.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오랜 습관과 반복으로 '혼자'만 알고 있는 '그것'을 상대는 알 방법이 없다. 이런 단순한 논리 때문에 '갈등'은 생긴다. 내가 해외에서 취업할 때 일이다. 당시 나는 좋은 조건으로 일을 하고 있었으나 산다기보다 생존하고 있었다. 하루 하루를 버텼다. 그날을 버티면 언젠가는 도달할 목적지가 있다고 여겼다. 내가 그렇게 여긴데는 다름아닌 '동료'의 몫이 컸다. 겨우 하루를 버텨내고 옆을 돌아보면, 나와 함께하는 동료는 어쩐지 나와 같은 표정으로 하루를 견뎌내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뗄 수 있는 이유는 누군가, 나와 같은 고통 속을 참아내고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지루하고 불안하고 막막했던 20대를 그도 나와 함께 견뎌내면서 일종의 전우애를 느꼈다. 지친다는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 그와 맥주 한 잔 한적 었었다. 그가 나에게 했던 이야기는 당시 충격이었다. 그는 견뎌낸 적이 없었다. 그는 단순히 단조로운 일상에 만족하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다. 수 년 간, 그의 표정에서 읽었던 '공감'과 '전우애'가 모두 부정 받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정말 눈꼽만큼도?' 그는 확고했다. 그렇다. 수 년을 나는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와 표정은 나에게 '나도 열심히하고 있다. 우리 견뎌보자!'를 말하고 있었다. 거기에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나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나를 지속하게 하던 힘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평생'을 함께 할 것 같았던 그 직장을 나는 얼마 뒤에 그만 두었다. 전투화가 무겁게 땅속으로 빨려가는 '유격훈련의 마지막 행군'은 고난이었다. 지금 당장 쓰러져 의무대로 실려가야겠다는 상상을 매 발걸음마다 하면서 그냥 걸었다. 걸었다기보다 옆에 녀석도 하는데 '참을 수 있는 정도인가 보다'를 지속했을 뿐이다. 돌이켜보건데 서로가 속고 속이는 가운데 우리는 '극한'을 넘겼을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절반이라도 간다. 입을 닫으면 깊이가 생긴다.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정확히 조약돌로 맞출 수는 없다. 가만히 서 있다면 그나마 확률이 높아진다고 할까. 입을 닫고 표정을 무심하게 두면 마치 죽어있는 시계처럼 누군가의 시간에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 있다. 무언가 맞추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쩌면 이렇게 보면 이렇고 저렇게 보이면 저런 '착시현상'일지도 모른다. 착시는 분명 착각이고 허상이지만 존재한다. 이태백의 달과 닐 암스트롱이 봤던 달은 모두 같은 달이나, 분명히 다른 달이다. 그것은 달의 허상이 아니다. 그 둘다 달의 진실을 본 것이다. 모든 것은 자신을 투영한다. 산도 물도 사람도 그렇다. 모두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럴때는 이렇게 보이고, 저럴 때는 저렇게 보인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 공간도 어떤 시기에 왔을 때는 슬픔의 공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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