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이 형편없음을 이해하고 있다. 머리를 스치지 않고 가슴에 꽂히는 문장을 만날 때마다 세상에 내놓은 글들이 한없이 민망하다. 그러나 꾸준하게 쓴다. 누군가는 읽을 거라 믿는다. 첫 책을 출간했다.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을 최대한 밀어 넣었다. 300쪽도 안되는 작은 공간에 쥐어짜듯 이야기를 적고나니, 책을 두 권 출간 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라 깨닫는다. 알고 있는 지식을 쏟아 넣는다. 인생의 철학도 밀어 넣는다. 책으로 쓰면 수 백 권은 될 거라고 자부하던 인생도 갈아 넣는다. 쥐어짜고 쥐어짜서 마지막 남은 한방울까지 깔끔하게 짜 놓고도 출간된 책은 200쪽이 되지 않았다. 더이상 아는 것도 없고, 더이상 새로운 인생 철학도 없다. 더군다나 내 이야기는 할 거리가 없었다. 그러나 얼마 뒤 나의 두 번째 책과 세번째 책이 출간됐다. 이어 2022년에는 4호와 5호도 출간됐다. 쥐어짜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마른 수건도 다시 쥐어짜고 또 다시 쥐어짜니 진한 액기스가 나온다. 희안하게 쥐어 짤때마다 농도 높은 액기스가 뽑아져 나왔다. 그 알맹이는 '실'하지 못하다. 되려 '탁'했다. 바닥을 드러낸 지식과 밑천 드러난 필력에도 그냥 썼다. 더이상 할 말이 사라지면 다른 이의 책에서 정보를 제공 받았다. 마를 만하면 들이 붙는 통에 그나마 뭐가 계속해서 진행된다. '소설'을 썼다가 누군가의 문체를 따라해봤다가 시를 써보기도 한다. 영어 문법에 대한 글을 썼다가, 경제에 관한 글을 썼다가, 문학에 대한 글을 쓴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글들 위로 '네이버'가 제공해주는 백원짜리 광고가 붙는다. 운좋게 누군가가 눌러주면 '쨍그랑'하고 '적선'이 붙는다. 쥐어짜낸 찌꺼기가 푼돈이 된다. '진짜, 오늘은 도저히 할 말이 없다.' 싶은 날도 꾸역 꾸역 한방울 한방울을 쥐어짠다. 바벨을 가슴 위로 들어 올리는 웨이트 운동에서 '스티킹 포인트'라는 말이 있다. 들어 올리는 근육이 어느 수준과 임계점을 넘어서면 힘이 약해져서 더이상 들어 올릴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하는데 그 포인트를 말한다.
진짜 운동은 그 마지막 '스티킹 포인트'를 돌파한 시점부터 시작된다. 무하마드 알리는 '하루에 몇개의 윗몸일으키기를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갯수를 세지 않습니다. 고통이 느껴지면 그때부터 숫자를 셉니다.' 고통을 넘어서는 순간부터가 성장이다. 글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어렴풋 아이들 재우려고 틀었던 자장가에서 '홀로 아리랑'이 흘러나왔다. 그냥 꼬불 꼬불한 고개를 넘어가는 노래라고 생각한 '아리랑'은 사실, 인생을 담고 있었다. 오르락 내리락하며 지나오는 길이 인생을 닮았다. 오르면 오른만큼 내려가고, 내려가면 내려간 만큼 올라가니, 올라갔다고 내려갔다고 좌절하거나 기뻐할 것도 없다. 홀로 아리랑의 가사는 지금 돌이켜 보건데 몹시 위로가 된다.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우리 조상들은 왜 그렇게 '아리랑 고개'를 노래 했을까. 오르고 내리는 반복이 음과 양을 닮아 인생과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은 좋은 일도 많고 나쁜 일도 많다. 내리막 길만 존재하는 고개는 존재하지 않는다. 친한 친구는 좋은 일에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자신은 나쁜 일이 있으면, '얼마나 좋은 일이 있으려고 이럴까'를 생각하고 좋은 일이 있으면, '얼마나 나쁜 일이 있을까'하고 생각한다고 했다. '좋은 일에는 한 없이 좋아해야지!'라고 당차게 조언했으나 나이가 들어차면서 얼마나 인생의 굴곡을 모르는 철없는 조언이었나 생각하게 된다. 블로그는 띄어쓰기가 시원 시원하게 있어야 '가독성'이 좋다. 예쁜 폰트를 고르고 색깔과 꾸미기를 하면 더 좋아진다. 쓰다만 삼류 수필 원고 마냥 보기 힘들게 늘여 놓는 것은 외면 당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외면 당할만한 글을 찾아 긴 시간 내어 읽어주는 사람들이 늘어나니 아이러니하면서 감사할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관음의 본능이 있다. 타인의 생각과 사적인 활동을 몰래 엿보는 일은 '성적 변태'만 갖고 있는 질병은 아니다. 유명인의 '일기'를 훔쳐보고 싶거나 누군가의 생각을 훔쳐보고 싶은 욕구는 '법'과 '도덕'에 의해 조절될 뿐, 우리 모두는 그것에 욕구를 느낀다. '서점'에 나열되는 '에세이'들은 따지고보면 누군가가 '그렇다'라고 생각한 생각들의 나열들이다. 그것이 나의 감정과 묘하게 어울리며 문체가 예쁘면 그것에 1만 5천원의 상품가치가 매겨진다. 그것을 지불하고 우린 누군가를 훔쳐본다. 다른 집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관찰카메라'로 보고, 혼자사는 사람의 일상을 훔쳐보고, 여행 온 사람들의 일상을 훔쳐본다. 고로 누구나 관찰의 대상이 된다. 다만 '관음'과는 반대로 우리는 '사생활'을 이유로 '보여주고 싶지 않아'하기도 한다. 보고자 하는 이들과 보여주지 않고자 하는 이들이 다수인 세상에 '보여주고자'하는 소수가 자신을 상품화하면 거기에는 '상품가격'이 맺여진다. 연예인이 갖는 병 중, '공황장애'는 관찰되는 그들의 직업상 질병이기도 하다. 극도로 불안하고 공포감을 느끼는 그들의 병은 감당해 낼 수 없는 시선이 그들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우울증과 그밖에 다양한 질병에 쉽게 노출되는 이유도 그렇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것은 그만큼 사람을 불안하게 하기도 한다. 우리는 각자 개인의 공간을 필요로 한다. 책을 몇 권 썼더니, 부모님은 말씀하셨다. '너무 까발려지는 느낌이구나.' 자신을 팔지 않고서는 상품가격은 형성되지 않는다. 그러니 남들이 흘려놓은 찌꺼기 국물들을 모아 모아 다시 모아 겨우 액기스로 쥐어짠다. 오늘도 이렇게 세문단을 겨우 마무리하며 하루를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