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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재미로 보는 현대문학, '조지훈'의 '낙화'

by 오인환

침향나무를 십자가 모양으로 깎으면 '예수'가 담겨지고, 불상으로 깎으면 '부처'가 담겨진다. 그것을 신성하게 여긴다고 해도 곱게 갈아서 꿀에 갈아 먹으면 '약'으로도 쓰인다. 이렇게 깍으면 천주교의 묵주가 되고, 저렇게 깎으면 불교의 '염주'가 된다. 묵직하게 깎으면 망치가 되고 날카롭게 깎으면 흉기가 된다. 다만 침향나무 자체에는 '예수'도 없고 '부처'도 없으며 '약'도 아니고 '흉기'나 '망치'는 더더욱 아니다. 이는 그냥 침향일 뿐이다. 이를 이렇게 보면 이런 의미가 있고, 저렇게 보면 저런 의미가 있다. 다듬어지기 전, '침향나무'처럼 '시'를 읽는 마음은 읽는 이가 정할 따름이다. '조지훈'의 '낙화'는 떨어지는 꽃을 의미한다. '떨어진다'는 것을 주의깊게 보자니, 상실감이 느껴지지만 '꽃'을 보자면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떨어진다고 꼭 상실감이나 슬픔은 아니다. 가을에 낙엽이 지는 것은 '아름다움'이고 눈이 내리는 것에 아이들은 즐거워 한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것이 어디 '시'만 그러할까. 이렇게 보면 이렇고, 저렇게 보면 저런 것이 시를 읽는 즐거움이다. 예전부터 굉장히 좋아했던 가수가 있다. 가수의 목소리는 감미롭고 마음을 잔잔하게 했다. 그 가수를 꽤 오랫동안 좋아했다. 내가 그 가수의 음악을 자주 듣는 것을 알게 된 누군가가 있었다. 누군가도 나와 함께 그 노래를 듣길 좋아했다. 시간이 한참이 지나고 누군가와는 이별했다. 내가 자주 듣던 잔잔한 노래는 이후, 그 누군가를 떠올리는 매개체가 됐다. 마음을 잔잔하게 했던 노래는 이제, 들릴 때마다 마음을 어지럽게 흐틀어 놓고 간다. 그 노래를 잘 듣지 못한다. 어쩌면 시도 그렇다. 어떤 시기에 어떤 마음으로 읽었느냐에 따라 '시'은 의미가 달라진다. 형광펜에 빨간펜을 번갈아가며, '이 부분은 설의법이네, 시험에 나오겠네'라고 읽은 시는 지금에와서 분명 다른 의미일 것이다.

조지훈의 '지훈'은 아호(시인을 부를 때 호칭)이지 이름이 아니다. 그의 이름은 '동탁'이다. '조동탁'이라는 인물은 '청록파' 시인중 하나다. 예전 을유문화사에서 '청록집' 시집을 출간했는데 거기에 함께했던 '박두진'과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라고 부른다. 그의 집안은 꽤 명망있는 집으로 '조지훈'하면 '대쪽'같은 인물 혹은 '선비'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떨이지는 꽃을 노래했다. '낙화'는 그렇다. 사람들은 그가 했던 노래에 시대적 배경과 인물의 배경을 입혀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으나, 그런 강박을 지우고 보는 것도 시를 읽는 재미일지도 모른다. 꽃이 지는 모습을 보고 '바람을 탓할 소냐'라고 묻는 그를 보면 과거 '국어선생님'이 설명하신 해석인 '자연의 섭리'가 맞다고 느껴진다. 내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던 '이치'가 이치대로 작동하는 모습은 당연하다. 김광석의 '서른즈음에'라는 노래를 들으면 '점점 더 멀어져 가는 청춘'이 느껴진다. 하루와 하루가 멀어져가며 시간의 덧없음이 느껴진다. '조지훈'의 '낙화'는 '자연의 섭리'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때론 그것을 즐기기도 하고 울고 싶어하기도 한다. 사람의 감정은 다면적이라 기쁨이도 종류가 많고 슬픔에도 종류가 많다. 이것을 '기쁘다' 혹은 '슬프다'라고 정의하면 다양하고 다면적이고 유동적이던 색이 갑작스럽게 '단색'으로 정리된다. '노자'가 말했던 것처럼 그것을 '언어'로 정리하는 순간 그 본질이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수 년 전, 꽤 신망있는 목사 님을 만난 적있다. '성경'을 읽는 법을 알려 주셨다. 누가 누굴 낳고, 그 누가 다른 누구를 낳았는지를 기록한 글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따져 들었을 때, 그는 '구약'이 아닌 '신약'의 아무 부분을 펴고 여러 차례 한 문장을 되뇌였다. 읽고, 다시 읽었다. 문장이 한 번에 들어오지 않을 때는 짧은 단위로 쪼개서 읊고 읊었다. 글을 음미하면 문장이 담았던 '맛'이 스믈스믈 느껴지더니 나중에 한 문장을 다시 읽었을 때,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시 탄생했다.

훑고 지나간 글이 아닌, 그것을 찬찬히 맛으로 음미했을 때, 그것이 담고자 했던 '맛'이 재대로 느껴진다. 각 시마다 담긴 문제 여러개를 시간 내로 풀어야하고 EBS 강사의 '시해석'을 2배속으로 들으며 미친듯이 받아쓰는 '시'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런 고압적인 '세뇌식 교육'은 어느정도는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아예 뭔소린지 도통 알 수 없는 글을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것보다 조금 더 그 깊이에 근접하도록 돕기도 한다. '우리 교육은 분명 잘못됐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마치 정답없는 문제에 정답을 정하게 하는 교육제도를 비판하지만서도 '조지훈 시인'의 아들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고위공무원으로 일하기도 하셨다. 다시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우리의 교육제도가 잘못됐음을 부정해도 '허준이 교수'는 대한민국 교육제도 중 '필즈상 수상자'가 됐으며 희안하게도 교과서에 실린 이들의 대부분은 '학력고사'나 '수학능력평가시험'에 고득점을 해버렸다. 조지훈 시인의 '낙화'는 여러가지 감정을 시에 담았다. 색체대비가 있고 인생의 덧없음, 인생무상을 떠올리게 하며 상실감과 비애의 감정을 표현한다. 쪽집게 강사의 해석에 반박할 여지가 없다. 우리 교육은 그런 의미에서 비판 받아야만 할 대상은 아닐지도 모른다. '조지훈'의 '낙화'라는 작품에 '시험평가'라는 목표만 제외해도 이처럼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다. 더이상 시험을 치지 않는 나이가 되니 과거 문학들이 고통에서 아름다움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 시절 고통스러웠던 것은 '과목'이 아니라 '시험'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또한 '조지훈'의 '낙화'처럼 때가되면 알아서 피고 지고, 언젠가는 고압적인 교육으로 '아름다운 시' 한 편 읽을 수 있는 능력에 감사하지도.

조지훈의 낙화를 살펴보자

낙화_조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 성긴 별이

하나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린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라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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