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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스스로 남성이 된 자의 이야기_맨 얼라이브

by 오인환


'무엇이 남자를 만드는가'


남성의 삶을 택한 '여성'의 이야기가 아니다. 남성의 삶을 택한 '사람'의 이야기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분류'하고 '나누기'를 좋아한다. '핵물리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과학은 물리학 아니면 우표수집이다'


물리를 제외하고는 현상을 수집하고 분류하는 활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애초에 '분류'는 인간의 몫이지 자연의 몫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남자'와 '여자'를 나누는 것은 '자연의 섭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편의상 분류한 활동일 뿐이다. 나무토막을 바라보면 거기에는 분명 가장자리와 '중앙'이 존재한다. 그러나 나무토막을 쪼개면 가장자리와 중앙은 바뀐다. 절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들도 사실상 '인식'일 뿐이다. '정체성'이라는 말이 있다. '정체성'은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지어낸 말이 아니다. 이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정의된 의미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정체성'을 깨닫고 있는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철학적이기에 거부감이 드는 이 질문에 가볍게 대답해보자.


'저는 나 입니다.'


'나는 누구죠?'


'이렇게 보여지는 바와 같이, 손과 발이 있고 눈코입이 있는 존재가 나 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손과 발이 잘려지고 나이가 들면서 눈과 코와 입이 변화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남자이고 서른이 조금 넘은 존재입니다.'


남자는 당신의 분류적 성질이지 '당신'이 아닙니다. 서른 하나가 되거나 여든 하나가 되어도 여전히 당신은 당신입니다.'


이런 식의 질문을 꾸준하게 던져본다.



당신은 누구인가. '성별'은 '나이', '국적', '피부색'과 같이 당신을 분류하는 성질 중 하나일 뿐이지, '당신의 본질'은 아니다. 당신의 본질은 무엇인가. 여든 하나가 되거나 예순 둘이 되어도 당신은 바뀌지 않는다. 이처럼 당신의 성별은 당신의 성질 중 하나일 뿐이지 본질이 아니다. 정체성을 고민하면서 유독 우리는 '성'에 대해 민감하다. '남성'은 '남성'다워야 하고, '여성'은 '여성'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살다보면,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적인 사람이 있고,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남성적인 사람이 있다. 이들의 본질이 어떻든, 대부분은 '성질'에 '본질'을 끼워 맞춘다. 본말이 전도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성질은 본질을 나타내는 여러 현상 중 하나이지, 그 자체가 정체성이 아니다. '동성애'를 반대하거나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성애자'나 '성전환자'와 같이 이미 '성소수자'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이 존재하는 것은 내가 '반대'하거나 '옹호'하는 것과 별개의 문제다.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지금 당장 내가 중력을 인정하지 않아도 언제나 중력의 영향을 받고 있듯, 인정하고 이해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를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석이 왜 잡아당기는지 그 원리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사용한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근대 물리학자들은 근대물리로 설명되지 않는 '닐스 보어'의 '양자역학'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닐스 보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자는 존재하기 위해 존재할뿐,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자역학 잘 모르겠으나, 그런 현상이 있다는 것만 압니다.'


이해가 되지 않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양자역학은 수학적으로 완전하게 존재하고 이미 활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이해'나 '인정'을 요하지 않는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맨 얼라이브'의 저자 '토머스 페이지 맥비'는 자신이 어떻게 유령과 같은 삶을 그만뒀는지 이야기한다. 자신의 '성질' 중 하나를 '본질'로 바라보는 사회에서 그는 그의 모호한 성질 때문에 '정체성 지우기'를 강요당했다.



아버지에거 성폭행을 당하고 여성에서 남성으로의 성전환을 하면서 그가 겪었던 자아혼란과 정체성 찾기는 분명 자극적이고 드라마틱하지만 그것은 그가 독특하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본질을 알고자 노력하는 것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남성'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남성'이라고 규정한 것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되고 있는가. 그는 '남성'이 되고 싶어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남성은 과연 사회가 바라보는 남성과 같은 것인가. 내적인 부조화는 '성별' 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해외에서 유학할 때, '바나나'라고 불려지는 이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교포들 중, 완전히 한인사회에서 멀어진 경우을 부르곤 했는데, '피부색은 노란색이나 속은 하얀색'인 바나나의 속성을 빗대어 부르는 말이다. 분명히 인종차별적인 별명이지만 우리는 모두 이런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기독교인이며 술과 유흥을 좋아하고 거짓말을 일삼거나 혐오를 조정하기도하고 불교인이면서 욕심에 눈이 멀어 고통 속에 빠지기도 하며, 모호한 직업을 가지며 스스로를 뭐라 설명해야 할지 곤란한 직업을 가진 이들도 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이분법적 분류'에 희생량이며 가해자이기도 하다. 자신이 우위에 있는 분야에서 다른 이들을 '이단'으로 바라보고, 자신이 불리한 분야에서 '다른 이들'을 원망하기도 한다. 토머스 페이지 맥비는 스스로 남자라고 생각했으나 여자로 태어났다. 그의 인생에는 큰 변곡점이 된 두 남자가 있다. 자신을 보호해야 함에도 학대한 아버지, 자신을 죽이려 했으나 살려준 강도. 이 두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9살과 서른의 시선을 통해 어떻게 남자를 바라보고 남자가 되어가는지 그 이야기를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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