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디로 가니 독후감
한 문장 단위로 감탄이 나온다. 문장력이 아니라 통찰력 때문이다. 1934년 출생 하신 이어령 선생은 붙일것도 많은 인물이다. 정의하기는 더 어려운 인물이다. 소설가이자 시인이고 수필가이자 정치인, 언론인, 문화평론가이자 교육자다. 통찰력이란 다방면의 개념을 두루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전모가 한 눈에 훤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야 이런 글을 쓸 수 있다. 다른 이들이 분류해 놓은 지식을 차곡차곡 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철학으로 잘 융합해야 가능하다. '너 어디로 가니'라는 제목은 정체성을 묻는다.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질문한다. 질문은 꼬리를 물고 들어가면 철학을 만난다. 이어령 선생의 글은 스치듯 지나가는 역사의 꼬리를 잡는다. 물고 늘어진다. 거기서 이어령 선생의 철학을 만날 수 있다. 1934년 생의 문학가는 대한민국과 세계의 역사를 제대로 관통한다. 이것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 중 행운이다. 국민학교 시절 1941년 태평양전쟁을 포함한 2차 세계대전을 지켜봤다. 1950년 한국 전쟁을 경험한다. 1980년 대 군사독재와 90년대 국가부도 사태를 바라본다. 직접 쌓은 데이터는 이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많이 배운 젊은 천재가 흉내내기 어려운 문학으로 남았다. 다른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처럼 책은 '꼬부랑 할머니'로 시작한다.
"옛날 옛적에 말이다..."
로 시작하는 옛날 이야기로 들린다. 지금과 같이 오락시설이 많지 않은 시절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화롯불'을 피워놓고 해주시는 이야기가 최고의 오락이었다. 그 시절 어린 손주들은 '화롯불'을 사이에 두고 어른들의 이야기에 심취했다. 시간이 흘러 젊은 이들의 오락거리는 늘어났고 '어른들의 이야기'는 시시하고 지루함의 대상이 됐다. '이어령 선생'은 '너 어디에 가는 줄은 알고 있니?'라는 신선한 질문으로 화려한 디지털 그래픽에 꽂혀 있는 젊은 이들의 시선을 잡아 당긴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천자문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천자문은 4자 1구로 총 250구로 이루어졌다. 천지현황(天地玄黃)을 외우는 서당의 아이들 사이에서 시키면 시키는대로 외우면 될 일을 이어령 할아버지는 '왜 하늘이 검고 땅은 누런지' 의문을 제시했다. 1846년 11월, 제주에 있던 추사 김정희는 대정현의 향교에서 질문하지 않는 아이들을 마주한다. 질문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만 하는 아이들을 보며 김정희는 학당 현편을 써준다. 그것이 바로 '의문당(疑問堂)'이다. "얘들아, 의심이 나면 질문 좀 해다오'하는 대문호의 바람이다. 질문하지 않는 젊은 아이들을 보며 교육의 방향이 일방적이어선 안된다는 사실을 본 것이다. 이어령 선생은 300년이 흐른 뒤, 젊은 이들에게 말한다. "의심이 난다면 질문좀 해보라. 너 어디로 가니?"
이야기는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했으나 꼬리를 물고 질문한다. 그것에 답을 찾아보고 찾은 답에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이런 식으로 지식이 들어갈 호기심의 구멍을 숭숭 뚫어 놓은 뒤, 명쾌하게 하나씩 채워 나간다. 그가 경험했던 여러가지 경험 중에서 '책보'와 '란도셀'의 이야기가 있다. '란도셀'이란 사실 이름도 생소한 단어지만 흔히 우리가 말하는 '책가방'과 닮았다. 가난과 뒤떨어진 문명의 상징이라고 여기던 '책보'에는 엄청난 철학이 있었다. 이 철학은 매우 단순하지만 단 한번도 고민해 보지 않는 일이다. 추사 김정희와 이어령 선생이 던졌던 질문처럼 나도 질문하지 않는 젊은 세대 중 하나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얼마 전, 각이 잘 잡혀 있는 책가방을 구매했다. 책가방은 아무것도 채워져 있지 않아도 각이 잘 잡혀 있었다. 이어령 선생은 여기서부터 문제를 삼았다. 책 보는 큰 물건을 담을 때는 담은 모양에 맞게 크기와 모양이 형성된다. 물건을 풀어 헤치면 보자기는 3차원 입체 모형에서 2차원 평면이 된다. 이것은 곱게 접어 부피를 줄일 수 있다. 종이 한 장을 담아도 꽉찬 모양이 줄어드는 법 없는 '가방'과 크게 대조되는 부분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여기서 '융통성'이라고 봤다. 일본과 서양에서 사용하는 '란도셀'은 이미 정형화 된 규격을 갖고 내용물과 상관없이 같은 모양을 유지한다. 그러고 보면 한국인은 분명 다른 이들에 비해 융통성이 있다는 것 만큼은 맞다고 본다. 짚신 또한 책보와 닮았다. 짚신은 오른쪽이나 왼쪽이나 상관없이 신을 수 있으며 정확한 신발 치수를 알지 않아도 편하게 신을 수 있는 신이다. 이것이 우리를 담고 있는 문화가 보여주는 우리의 모습이다. 정체성이란 작은 하나로 시작하여 여러가지 부산물을 만들어낸다. 일제 강점기를 주제로 하는 이 책에서 일본과 한국의 비교는 자주 나온다. 일본의 문자와 한글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의 일본과 한국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의 문자는 한자를 가지고 왔다. 일본인들은 복잡한 한자를 단순화하여 개조하여 보급한다. 영어 단어에는 Kaizen(카이젠)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의 어원은 '개선'을 나타내는 일본어 '가이젠(改善)'에서 유래했다. 일본인들의 특징은 '개선'에 있다. 생산과 상품에 대한 전반에 대해 이전보다 더 효율적이고 나은 방법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일본인들을 발전한다. 일본어가 한자와 닮았으나 표음문자이면서 그 획 수가 획기적으로 줄어든 것은 일본인들이 가진 장점에 있다. 반면 우리 한글은 전반적으로 완전히 뒤집어 버린다. 일본인들이 말하는 '개선'이 아닌 '혁신'을 말한다. 혁신이랑 아이디어의 원친이 외부, 내부 상관없이 완전히 새롭게 도입하는 방식이다. 완전히 뒤집어 엎고 다시 시작하는 이런 사고 방식은 '한글'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문자 체계를 만들었다. 여기서 '우리가 옳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 급변하며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화하는 시대에 일본의 산업은 지금도 '개선'에 촛점을 맞추며 더딘 성장에 어려워한다. 반면 우리는 기존의 것들을 버려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갈아탔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과거의 것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정체성 마저 잃어버리기도 한다. 식민지 시대 우리는 생각보다 다양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가졌고 이미 혁신을 위해 버려 버린 것들 중에서도 너무나 소중한 것들이 있다. 빠르게 지나가는 젊은 시대를 바라보며, 이어령 선생은 다시 묻는다. '너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가니?'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