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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질서라는 허상_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by 오인환



'질서(order)'라는 단어는 '오르디넴(ordinem)이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이는 베틀 위에 가지런한 선을 묘사하는 말이다. 이 단어는 지배자 밑에 가지런한 피지배층을 묘사하는 은유로 확장했다. 자연에는 질서가 존재하며 인간은 그 질서를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자연이 숨겨 놓은 질서를 찾는다.' 그것은 신의 뜻을 읽는 것과 같았다. 질서를 찾는 일을 인간은 '분류학'이라고 명명했다. 어떤 것들은 다른 어떤 것들에 상위하고 반대로 다른 어떤 것들은 어떤 것들에 하위한다. 인간이 가진 분류에 대한 개념은 꾸준히 자연에 없던 질서를 인위적으로 부여했다. 자연을 분류하던 인간의 습성은 '생물'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인간'으로 확장됐다. 인간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며 나누고 분류하고 계층화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대체로 인간은 '분류'하고 '정의'하고 '정리'하는 일을 좋아한다. '자연'을 모방한다는 명분으로 정원을 가꾼다. 불규칙적으로 어질러진 것을 가지런하게 배열한다. 아무렇게나 위치한 돌이 재배치되고 마구잡이 자란 나뭇가지가 쳐진다. 자연을 모방하는 와중에 벌어지는 가장 자연스럽지 못한 행위를 자행한다. 자연에 질서가 있을 거라는 착각은 오래됐다. 자연이 숨겨놓은 숨바꼭질 술래 찾기를 위해 꽤 많은 사람들은 자연계와 인간계에 질서를 탐구했다. 기원전 551년 노나라에서 태어난 '공자'는 지저분한 중국 정세에 질서가 필요하다고 봤다. 신분과 사회에도 정리와 질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공자'는 '자연적'이지 않은 가장 '인위적'인 사상을 가진 셈이다.



철학에는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상이 있다. 모든 것들은 인간이 발견하기 전까지 추상적인 에테르적 차원에 머물다가, 누군가가 그것을 발견하고 이름을 만들어내면 그제야 존재가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다. 양자역학적인 이 관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철학은 인간이 '분류'하는 일에 명분이 됐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상태다. 인간이 이처럼 질서, 정리, 분류를 좋아하는 까닭은 기본적으로 생물학 진화 과정에서 생긴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본다. 불확실성은 마구잡이의 가능성이 산재된 상태다. 인간이 밤이 되면 어둠을 두려워하여 불을 밝혔던 이유도 그렇다.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에는 불을 밝혀 뭐든 발생할 수 있는 불확실성을 줄이는 일이다. 고로 인간은 어떤 것을 분류하고 밝혀낼 때마다 희열을 느끼고 불확실성을 해소해 나갔다. 이런 분류는 대체로 과학적 진보와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한 경우도 있으나 엉뚱하게 '제노사이드(인종청소)'나 '우생학'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필요와 불필요에 따라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는 일.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 중에서 열등한 것을 걷어내는 일. 이런 일들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며 더 나아가 '신'이 숨겨놓은 술래를 찾는 일처럼 굴었다. 다만 철학적 개념에 '민들레 원칙'이라는 개념이 있다. '민들레 원칙'이란 어떤 상황에서는 추려야 할 잡초도 다른 상황에서는 경작해야 하는 가치 있는 약초가 된다는 의미다. 이 원칙은 가장 질서 정연할 자연이 부여한 질서가 바로 '무질서'라는 것을 일깨운다.



단순히 '물고기'라는 분류는 분류학적으로 '어류'를 어떻게 볼 것인지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모호한 개념을 반드시 어떤 서랍장 안에는 넣어야 직성이 풀리고 마는 우리의 강박을 고민하게 한다. 해외에서는 전량 처분하여 버리는 쓰레기를 우리는 비싸게 수입하여 요리로 내어 놓는다. 소나 돼지의 내장과 뼈들이 그렇다. 제주에서 대량의 감귤이 출하되고 나면 다량의 비상품들이 '파치'라는 이름으로 남는다. 이것들은 전량 감귤주스 공장으로 들어가 '음료'가 된다. 벗겨지는 껍질들은 '귤피차'의 재료가 되고 알맹이는 주스의 원료가 된다. 감귤주스는 '상품'으로 만들지 않는다. '파치'로 만들어진다. 결국 '민들레 원칙'에 맞게 불규칙하고 무분별하게 산재된 무질서들은 각자 그 시기와 상황에 맞게 쓰임이 생긴다. 자연이 부여한 규칙은 바로 '불규칙'이다. 우리말 '물고기'라는 분류가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냐면 이를 대체할 대안의 용어가 없으면서 생물의 분류에 '고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물가나 물에 있는 생물을 모두 '물고기'라고 분류한다면 수영장에 있는 피서객들도 모두 '물. 고. 기'가 되어 버리는 웃지 못할 상황이 생긴다. 이것은 철학의 문제고 명명의 문제이지만 작은 씨앗으로 인간은 사회에 웃지 못할 오점을 만들기도 했다. 우생학의 시작은 그렇게 '물고기가 있다'라는 생각에서 시작했을지 모른다. 이런 분류의 역사는 굉장히 오랜 기간 바보 같은 역사를 선물했으나 그것의 끝도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아간다는 것은 '확실성'으로 뻗어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곳'으로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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