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사촌들과 '부루마불'이란 게임을 했었다. 가장 좋아하는 게임이었다. 공식 명칭이라고 생각했다. 해외에서 일상 중 'Monopoly'라는 보드게임을 만났다. 어린 시절 친숙한 부루마블과 모노폴리 중 무엇이 원조인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상상을 초월하게 많고 다양한 보드게임이 있었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모노폴리'라는 명칭이 쉽게 머릿속에 내려앉지 않았다. 그곳에서 '뉴질랜드 지도'를 배경으로 한 모노폴리를 구매했다. 아이들과 해보려고 다시 집안 곳곳을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아마 집 어딘가에 짱박혀 조용히 내 선택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온통 영문으로 적힌 '모노폴리'는 쉽게 게임에 몰입되지 못했다. 게임의 몰입을 방해한 것은 '영문'이라는 외국어가 아니라, 보드 위에 그려진 '지명'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국가와 '지도', '국기' 등에 관심이 많았다. 구매하고 판매하는 와중에 벌어지는 '수익구조'에도 흥미를 가졌다. 이 모든 걸 완벽하게 충족하는 보드게임에서 '국가'가 아니라 '관광 지명'을 적어 놓은 '모노폴리'는 '언젠가 하겠지'하며 묵혀두는 썩은 된장과 같았다. 상당히 다양한 방식의 전략이 있는 '모노폴리'와 달리 '부루마블'은 조금 단순화됐다. 전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주사위를 잘 굴리냐'라는 '운'이다. 게임은 운칠기삼으로 전개된다. 거기에 컨트롤러는 '선택'이라는 놈이 쥐고 있다. 나쁘지 않게 진행되는 게임 중 남이 사놓은 '서울'이라는 땅을 밟는 순간, 모든 것은 내려앉는다. 어찌 보면 '선택'과 '집중'이 성공의 '키'라는 누군가의 말보다 더 중요한 걸 이 보드게임을 알려줬다. '선택'과 '집중'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일 뿐이지, 성공의 '키'는 아니다. 키는 임의로 굴려지는 주사위의 숫자다. 그리고 거기에 선택과 집중이 마중물 역할을 한다.
사촌들과 '부루마불 게임'을 하면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언제나 결과는 '나'의 승리다. 게임 중반부 이후부터 나는 항상 은행보다 돈이 많았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잔돈을 바꾸거나 은행으로부터 돈을 지급받을 때마다 곤란에 빠졌다. 그때마다 나는 은행에 높은 이율로 돈을 빌려줬다. 지도의 한 바퀴를 돌면 받는 50불도 지급하지 못하는 무능한 은행을 어린 나는 비웃었다. 다른 참가자들이 게임에 흥미를 잃어갈 때쯤, 나는 이 못된 갑질을 조금 더 이어가고 싶었다. 가령 '내 땅'에 도착한 이들에게 '돈'을 받는 대신 상금을 주는 이벤트를 열었다. 플레이어들은 '내 땅'을 밟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땅'없는 이들은 '땅'은 없지만 '돈'이 생겼다. 내가 이벤트를 아무리 진행해도, 그들은 나의 다른 땅을 밟고 갖고 있는 돈을 나에게 도로 뱉었다. 그러나 다시 엄청난 돈을 이벤트로 뿌리면 불평 없이 게임을 진행했다. 어린 시절 그런 경제관념에서 깨우친 것이 있다. "'고소득'보다 중요한 것은 '자산'이었구나"라는 사실이다. 자산은 게임의 방향을 움직인다. 언제든 회수 가능한 '소득'보다는 '자산'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와서 고백컨대, 내가 하던 게임은 약간에 부정행위가 있었다. 게임 초반에 5가 나온 주사위에 6칸을 가거나, 4가 나온 주사위에 5칸을 가는 한 번의 부정행위를 했다. 그것이 실수라고 자신을 속이고 이뤄진 부정행위다. 단언컨대, 내 부정행위는 반복적이지 않았다. 단 1회였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게임 중 실수던 고의던 잘못된 플레이를 한 번씩 했다. 게임에서 나와 그들이 다른 것은 '언제', '그 실수를 하느냐'다. 참회컨대 그 부정행위가 나쁜 일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게임 후반부터는 '매우 정직'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정직'해도 괜찮았다. '넘치는 잔고' 덕분에 불쌍한 플레이어들에게 50만 원짜리 지폐를 투척해도 괜찮았다. 대충 수백만 원을 '이벤트'로 기부하고 나면 최초에 했던 부정행위의 악행이 물타기되고 참회 받았다고 여겼다.
게임은 초기에 1회 부정한 나로 시작했으나 점차 더 부정해지는 다른 플레이어를 만나게 됐다. 파산 직전에 놓인 플레이어는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더 부정해지기 시작했다. 느낀 바는? 어쨌건 게임을 진행할수록 키를 잡은 이는 덜 부정해지고 키를 놓친 이들은 가장 부정스럽게 변했다는 사실이다. 게임은 '초반'이 가장 중요했다. 그때를 잡지 못한다면 그 뒤는 진행 하나 마나다. 선택과 집중만으로 승기를 잡을 수 없다는 깨달음, 후반에 뒤집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 그것은 그 게임에서 어린 내가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던 원칙이다. 후반에 뒤집기 어렵다는 사실은 '소득'의 개념과 전혀 다르다. 초반에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하던 나의 잔고는 500원짜리 몇 장이 고작이었으나, 나는 '서울', '도쿄', '뉴욕' 등의 여러 자산을 갖고 있었다. 그 뒤에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많이 갖고 있던 사람이라도 그 돈을 전부 나에게 토해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부루마불' 게임의 은행은 플레이어가 한 바퀴 돌 때마다 50만 원씩을 지급했다. 벌금과 기타 세금으로 회수하기도 했다. 실제 중앙은행이 하는 금리 인상과 인하, 인플레이션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것들은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나 실제로 게임을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은행의 돈'은 플레이어들에게 많이 풀렸다. 모두가 시작보다 돈을 더 많이 가졌으나 '주사위의 운'에 의해 밟게 될 다른 누군가의 땅값은 더 비싸졌다. 아무리 많이 벌어도 게임이 진행될수록 '고소득'도 한방에 파산하기 십상이다. 게임은 반복했다. 파산하고 싶어 하지 않는 다른 플레이어에게 나는 여러 가지 조건을 붙였다.
"게임 끝나고 정리를 네가 하면 100만 원 깎아줄게."
"노래 한곡 하면 100만 원 줄게."
사실상 게임은 승자는 정해졌으나, 상대는 다시 큰돈을 받고 게임에 참여했다.
지금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게임에 임했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생명처럼 느껴졌다. 어쨌거나 이 '보드게임'이 어른들의 세상과 너무 닮았다는 사실은 서른이 넘어서야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