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발] 관찰하라. 깨달아라_왓칭 1편, 2편구슬들이

by 오인환

구슬들이 날아간다. 두 개의 구멍을 통과한다. 반대편으로 나오는 구슬들은 구멍의 모양대로 두 개가 될 것이다. 물결이 친다. 두 개의 구멍을 통과한다. 반대편으로 나오는 물결은 두 개의 구멍을 통과하며 출렁거리는 파동 두 개를 형성한다. 분명 그렇다. 젊은 천재 과학자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과학자는 원자핵 주위를 돌고 있는 알갱이를 이중슬릿이라고 하는 '구멍'에 던졌다. 여기서 희한한 관경을 마주한다. 관찰하고 있을 때는 구멍을 지난 구슬이 반대편에 두 개로 줄지어 나왔다. 반면 관찰하고 있지 않자,이것은 물결 무늬와 같이 나왔다. 그것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관찰하는 이가 있을 때는 '물질'인데, 관찰자가 없을 때는 '파동'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 미시세계의 역학운동을 '양자역학'이라 한다. 분명 양자역학은 수학적으로 완전히 존재하고 실험적으로 증명됐다. 다만, 왜 그것들이 그렇게 움직이는지 우린 알지 못한다. 세기의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그 누구도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시세계는 왜 그렇게 작동하는지 물리학자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 이상한 현상은 거시세계에는 없다. 태양의 주변을 도는 지구가 누군가가 지켜보면 물체고, 지켜보는 이가 없다면 '파동'이라고 말하면 그를 제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리학자들의 혼란은 여기서 시작한다. 거시 세계와 전혀 다른 미시 세계의 역학운동, 통일된 운동 법칙은 그동안 물리학의 불변의 법칙이다. 젊은 과학자, 닐스 보어가 말하는 '미시세계'의 양자역학을 아인슈타인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보게, 저 하늘에 있는 달을 보지 말아 봅세. 이제 저 달이 파동이라고 말할 수 있나?"

아인슈타인이 묻는 질문에 닐스보어는 답한다.

"모릅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했다. 젊은 과학자는 양자역학을 인정했으나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것들은 그렇게 움직이는가.

이 질문에 닐스 보어는 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현상이 있다는 것은 압니다."

지금도 '오컬트'와 연결되 많은 재료로 사용하는 양자역학을 세기의 천재들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도 끝내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닐스보어는 다시 말했다.

"우주는 존재하기 위해 존재할 뿐, 우리에게 이해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가 찰 노릇이다. 분명 존재한다. 완전히 증명된다. 수학적으로 명확하다. 심지어 기술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 알지 못한다. 양자역학의 아이러니다. 관찰자가 관찰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은 파동이다. 관찰자가 관찰하면, 세상은 비로소 입자가 된다.

머리 아픈 물리학 이야기는 접어두고, 다른 화두를 던져보자.

당신은 누구인가. 질문에 답해보자. 이 질문에 당신은 이름을 말할 것이다. 이름이란 세상 밖을 나왔을 때부터 지어지는 것으로 당신은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존재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다시 답해보자. 남자이거나, 여자라고 답할 수도 있다. 아니다. 당신은 성별이 존재하기 전 부터 이미 세포 분열 중이었다. 다시 묻는다.

당신은 누구인가. 답해보자. 부모? 직원? 사장? 아들? 아니다. 그 무엇도 당신의 본연은 아니다.

명확하게 어느 순간부터 당신으로 규정할 수 없지만, 우리 인간은 '이름'을 짓고 난 뒤부터 당신이라 규정한다. 그것은 사회적 관념이지 생물학적 존재는 아니다. 당신은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존재했고 뱃속에서도 정자와 난자의 형태로 나눠져 존재 했고 그 전에는 화학의 형태로 존재했다. 화학의 형태는 태양빛 에너지와 원자의 형태로 존재했다. 그 전에는 다른 어떤 모습이었고, 그 전에는 또 다른 어떤 모습이었다. 다만 지금 설명한 생물학적 '당신'은 '당신'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신체'일 뿐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인가.

그렇다. 당신은 알아차리는 관찰자다. 당신은 당신의 신체가 화학적 변화에 의해 슬프거나 기쁜 '감정'이라는 허상을 짓는 일을 깨닫고 관찰하는자다. 그것을 '알아차림'이라고 부른다. 당신은 '알아차리는 본연'이다.

눈을 감아보자. 얇은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미세한 빛을 잊고 머릿속에 떠 다니는 상념을 바라보자. 당신의 머릿속에는 온갖 상념이 떠돈다. 그것을 '걱정'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잡념'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때로 그것에는 '감정'도 섞여 있다. 불순물이 잔뜩 섞인 흙탕물 같은 당신의 머릿속은 쉴새 없이 휘몰아친다. 흙탕물을 휘젓는 것은 '감정'이라는 회오리다. 감정이 마음을 휘져으면 상념은 엄청나게 마음을 뿌옇게 만든다. 그 뿌연 마음은 대게 판단력을 흐린다. 투명하고 깨끗한 물안경을 쓰고 '흙탕물'이 된 상념의 물 속을 관찰하는 당신은 '관찰하는 자'다. '알아차림' 본연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고 해보자. 그러나 당신은 화가 나지 않았다. 당신의 신체가 화를 내고 있다. 당신은 그것을 관찰한다. 이것은 글로 읽으면 한낱 '헛소리'로 치부할 수 있으나, 수천년전 붓다가 가르친 명상 수행이다. 붓다는 '깨닫는 사람'이다. 관찰자는 알아차리는 자다. 알아차리는 자는 깨닫는자다. 우울한 이는 자신이 우울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이 우울하다는 사실을 관찰한다. 눈을 감는다. 정수리부터 커다란 스캐너가 스캔한다. 정수리. 이마. 눈. 코. 입을 지나 어깨를 내려오고 가슴과 배. 무릎과 발가락 끝까지. 스캐너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제3의 눈으로 자신을 관찰한다. 이 또한 명상 수행의 방법이다. 또 다른 하나도 있다. 당신은 신체를 빠져나와 영혼으로써 머리 위에 서 자신을 지켜본다. 이제 10미터를 올라간다. 당신을 담고 있는 지붕 끝에서 당신을 본다. 다시 100미터를 올라가고 1000미터를 올라가고 관점은 확장하고 우주로 넓어진다. 세상 만물이 작아지고 당신을 아주 객관적인 대상으로 바라본다. 이또한 명상 수행법이다. 어째서 명상수행은 자신을 관찰할까.

그것이 왜 그렇게 되는지는 모른다. 모른다고 현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꽤 많은 실험 결과와 통계는 관찰자 효과를 말한다.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통계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심지어는 물리학적으로 모든 것이 그것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만 우리는 모른다. 그것에 왜 있는 건지. 그것은 '오컬트' 영역을 오가는 '양자역학'을 몹시 닮았다. 역시 대부분의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존재하는 무언가를 사용한다. 오늘도 원리를 모르는 최첨단 전자기계를 사용한다. 도통 어떤 원리로 이뤄지는지 모르는 메신저의 사용을 당연하게 여긴다. 모른다고 없는게 아니면, 일단 사용한다. 당신이 누구인지 파악한다. 그것은 당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모든 것은 당신이 관찰하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이 관찰하므로 존재한다. 당신 또한 그렇다. 당신은 당신을 관찰하는가. 당신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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