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자욱하게 낀다. 상대는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있는데, 보기에 따라 흐려진다. 그렇게 보이기도 하고 저렇게 보이기도 한다. 믿음은 때에 따라 바보 같고, 때에 따라 현명하다. 사람은 살면서 믿어야만 하는 대상을 갖는다. 반대로 많지 않지만, 의심해야만 하는 대상도 갖는다. 관점에 일관적이지 못하면 이쪽이나 그쪽은 '헤어질 결심'을 한다. 진실로 다하면 언젠가 알아준다는 아름다운 동화 이야기는 사실 없다. 진실을 다해도 상대는 모를 수 있다. 반대로 거짓을 말해도 상대가 쉽게 속아 넘어간다. 바보 같은 사람이 되거나, 혹은 바보 같은 사람이 돼야 한다. 두 바보 같은 사람은 다른 종류로 어리석다. 교활한 누군가에게 순진하게 속아 넘어가거나, 순진한 누군가를 끊임없이 의심한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바보 같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누구를 믿는다거나, 의심한다면, 어리석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 한다. 다만 인간은 모른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의심과 믿음 중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것은 이미 바보 같음이라는 결과로 향하는 일이다. 차선은 없다. 어차피 정해진 정답에 대부분은 갈등한다.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를 받는 일이냐, 저녁에 4개, 아침에 3개를 받는 일이냐. 인간이 의미 없는 갈등이 휩싸여 있을 때, 우리는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에 안개를 덧댄다. 상대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지만 혼자 이렇게 보고, 저렇게 보기를 반복한다. 혼자만의 착각 속에 갈등이 최고조에 다 달았을 때, 상대는 안개를 두고 사라진다. 상대가 사라지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 인생에는 '최선'의 선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차선과 차악의 선택권도 있다. 우리가 대부분 하는 후회는 '최선'을 택하지 않음에 온다. 고로 최선을 택하기 위해 차선과 차선을 갈등하는 사이. 모든 건 안개 뒤로 사라지고 마지막 남은 '최악'의 선택을 고른다.
박찬욱 감동의 '헤어질 결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자신을 가지고 논다고 생각한 남자가 여자에게 한 말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답한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그들의 관계를 지켜보는 독자 혹은 관객은 외줄에서 오른쪽과 왼쪽을 간신히 균형 잡고 있는 관점에 선다. 실제로 여자는 남자를 만만하게 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여자는 꽤 나빠 보이는 것처럼 그려지기도 했다. 믿음과 의심을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한결같은 남자와 여자의 표정은 달라 보인다. 순진한 웃음에는 '사이코패스'의 사악함이 보이고, 흉측한 범행에는 '억울하고 불쌍함'이 보인다.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은 있다. 내 눈앞에 있는 안개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놓치는 경험. 그때 더 매몰찼다면 어땠을까 혹은 그때 덜 매몰찼다면 어땠을까. 사실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결과는 같다. 그것은 곧 '결심'이 된다. 진심, 의심 이것의 줄타기에 지친 상대는 언제나 '결심'을 한다. 1 더하기 1은 2인 것처럼 명료한 결과다. 알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 갈등 속에도 아둔하게 더 정확한 판단을 하기 위해 우린 '인공눈물'이나 '안약'을 눈에 짜 넣는다. 다만 그것은 자신의 눈을 맑게 한다고 달라지는 성격은 아니다. 안개라는 본질을 거둬야 가능하다. 더 정확한 선택을 하겠다는 생각. 그것은 언제나 상대와 나를 가른다. 얼마 전에는 '넷플릭스'에서 '수리남'을 봤다. '수리남'에서도 비슷한 영감을 가졌다. 모두를 의심하고 모든 상황을 의심하는 상황 말이다. 지켜보는 이에 따라, 그렇게 보이고 저렇게 보인다. 그들의 표정과 연기가 모두 의심스럽거나, 모두 믿음직하다. 연기하거나 대본을 쓰는 이들이 인물의 관계를 모두 설정해 놓고 썼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는 이것들은 보기에 따라 달라 보이는 '착시현상 그림'을 닮았다.
누군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눈썹이 없는 이유에 대해 '철학'을 집어넣다. 왜 그녀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포개고 있는지에 대한 해설도 잔뜩 있다. 그것은 해석이다. 해석은 주관적이다. 그렇게 보기에 그렇게 보이고, 저렇게 보기에 저렇게 보이는 것이다. 제주도 산간 지역에는 가을이 되면 예쁜 단풍이 진다. 누군가를 단풍을 보고 무심한 세월을 느낀다. 누군 간 떨어지는 생명에 대한 슬픔을 느끼고 누군 간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저 그 시기가 되어 떨어지는 낙엽에도 이처럼 사람들의 시선은 다르다. 말하는 이가 '명확한 메시지'를 넣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자연을 담는 일이다. 자연을 담기 위해서 작품은 자연을 닮아야 한다. 그렇게 보이기 위해 발악하는 작품이 아니라, 그렇게 보면 그렇게 보이고, 저렇게 보면 저렇게 보이는 경우. 이것은 자연을 닮았다. 다시 말하면 인간을 닮았고, 삶을 닮았다.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를 보면 난폭한 마피아나 소아성애자 등 각종 범죄자가 등장한다. 도통 '악'으로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그들의 내면으로 드라마는 하나씩 들어간다. 물론 어떤 방법으로도 죄를 합리화할 순 없다. 그러나 인간 답지 못한 그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일말의 동정은 생긴다. 교도소를 방문하면 그곳의 대부분은 '흉악한 범죄자'가 아니라, 억울하거나 실수한 이들 천지라고 한다. 우리는 '죄목'에 그 인간을 담고 그가 흉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지 않다고 이해한다. 삶은 그것보다 덜 분명하다. 우주는 원래 분명한 것 하나 없이 창조했다. 찬물과 뜨거운 물에는 구분이 없고, 빛과 어둠도 구분하기 힘들다. 세상은 아주 섬세하게 촘촘한 그라데이션층으로 이뤄져 있다. 그 안개 같은 모호함 때문에 실수하기에 인간이다. 거꾸로 돌아가 보면 '진심'을 믿던, '의심'을 하던,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우리는 '바보'스러움을 벗어나지 못한다. 만약 갈등하고 싶지 않다면, 그냥 하나만 하라. 그도 아니면 진심과 의심이 주는 갈등의 번뇌를 담담히 맞이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