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뭐, 운명이니까. 정답은 없어."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힘'.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 사과가 바닥으로 끌어 당겨지는 것 처럼, 100도 넘은 물이 끓는 것처럼, 그래야 할 것들은 마땅이 그렇게 된다. 우연도 일종에 운명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납득하지 못할 이유가 겹겹히 쌓이다 오늘이 된다. 결과만 놓고보면 과정은 납득 불가능하다. 그런 일이 쌓여진다. 그러니 그것을 운명이라 불러야 한다. 누군가를 알게 됐다. 그와는 공통점이 많았다. 생일이 같은 달에 있었다. 아이러니하게 그 부모 형제의 생일이 모두 하루 차이가 났다. 듣고 있는 이어폰 한쪽을 빼다가 내 귀에 꽂는다. 거짓말처럼 방금 전, 내가 듣던 노래가 재생된다. 같은 구절, 같은 속도. 시간이 지났고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다. 그 또한 운명이라 생각한다. 운명은 개척해 내는 일이라고 한다. 운명을 개척해 낸다면, 그 또한 운명이다. 오른쪽으로 던진 공이 왼쪽으로 움직이지 않듯. 운(Fortune)은 강력한 힘(fort)으로 작동한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생각하면 생각보다 쉬워진다. 해야 할 일에 명분이 되거나, 이별에 위로가 되거나, 인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별한 것들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만남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는 일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지금 나 또한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완성된 것이다. 여름에 눈이 내리거나, 겨울에 장마가 내리지 않는 것처럼 모든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에 일어난다. 참 기가막히게 남들이 필사의 노력을 해도 갖지 못하는 것들을 갖는다. 쉽게 갖게 된 것에는 미련이 없다. 그것들을 쉽게 놓아주고 나면, 사람들은 말한다.
"너무 아깝다. 왜 그러셨어요."
만나는 사람들마다 물으면 이런 저런 대답을 했었다. 명확한 하나의 이유 때문은 아니다. 왜 늦었냐는 질문에 되도 않는 변명을 늘어 뜨리는 불량 학생처럼 내 결단에 지저분한 명분과 이유를 달수록 내 선택을 믿지 못했다. 꽤 오랜기간 많은 질문에 대답한 끝에 간결한 답을 찾았다.
"그러게요. 이럴라고 그랬나보죠."
귀찮아서 뱉은 대답치고 꽤 정답이다. 그 뒤로 궁금하지 않은 질문을 뱉는 사람들에게 같은 대답을 한다. 따져보면 그렇다. 이럴려고 그랬다. '선택'은 권한이다. 사건의 '원인'이다. '시작점'이 된다. 뒤에 따르는 것은 '결과'다. '책임'이 필수적이다. 책임은 의무다. 의무는 부담이 된다. 대게는 부담을 피하고자 '선택'이라는 권한을 남에게 양도한다. 양도하면 '책임 전가'가 가능하다. 그것을 한 자로 말하면 '탓'이라고 부른다. 다만, 실제로 내가 넘긴 책임의 본질은 양도되지 않는다. 가혹하거나 억울한 일이다. 선택은 남이 하고 뒷수습은 본인의 몫으로 떨어지는 일 말이다. '결정장애'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돌았다.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선택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선택에 대한 책임을 무서워 할 뿐이다. 어떻게 하면 탁월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오래 전에 찾았다. 바로 '결과'에 최선의 만족을 해버리면 된다. 중국집 메뉴를 선정할때, 자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고민된다면 훌륭한 선택을 하는 방법은 당음과 같다. 아무거나 고른다. 다 먹으면 입으로 뱉는다.
"아! 잘 먹었다."
그것은 최선의 선택 방법이다. 결과를 해석하는 방식을 바꾸면 언제나 최선의 선택이 된다. 내 가장 친한 친구는 축구를 잘했다. 그가 공을 차면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곳에 공이 떨어지곤 했다. 그에게 내가 방법을 묻자, 그는 답했다.
"원하는 곳에 공을 차는 게 아니야, 아무데나 차고 그냥 으스대면 돼."
그랬다. 그는 탁월한 패스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결과를 해석하는 방식이 남달랐던 것이다. 그의 패스는 언제나 실패가 없었다. 운명이란 알 수 없다. 54개의 무작위로 섞인 카드는 노력 여하로 바꿀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무슨 카드를 꺼내 들어도 기뻐하면 된다. 누군가가 물었다. 그 한 장이 '스트레이트'를 결정할 중요한 카드였다면 어떠하냐고 말이다. 대답했다. 게임의 목적은 '승리'지만, '게임'은 '승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재밌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인생의 최종목적은 '부자가 되기 위해'도 아니고 '이기기 위해서'도 아니다. 인생은 그저 그 자체로 좋아야 한다.
'집고양이'와 '길고양이' 어느 쪽이 더행복하냐는 질문에 정답은 없다고 말한다. 이마 꽂혀 있는 화살촉에 과녁을 맞춰 그리면 언제나 정답이다. 남이 만들어 놓은 게임의 규칙을 지키기에, 우리는 언제나 게임의 규칙을 자신의 멋대로 바꿀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그것을 조금만 먼저 안다면 후회할 일도, 선택을 망설일 이유도 없다. 어떤 선택이던 탁월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정말 좋은 선택'을 할 것이 아니라, 결과를 해석하는 방식을 '초긍정주의'로 바꾸는 것이다. 방송인 노홍철은 자신을 '럭키가이'라고 부른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행운일리 없다. 그가 방송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어떤 때에는 불운해 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을 '긍정'으로 둔다. 누군가는 이를 '자기합리화'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다만 오랜 공부를 하던 '고승'이 이루려는 '해탈'의 경지도 넓은 의미에서 '자기합리화 연습'과 다르지 않다. 세상에는 어차피 정답이 없다. 모든 것은 해석의 여지를 가지고 있으며, 해석의 주체는 '본인'이거나 '남'이다. 남이 정한 해석의 범주는 대게 한 가지인 경우가 많다. 자신은 언제나 그 해석을 달리하며 언제나 실패하지 않는 성공한 인생으로 바꿀 수 있다. 자신의 선택이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 종족이 탄생은 이렇다. 이들은 언제나 성공한다. 백종원 대표의 젊은 시절을 보면 홍콩에서 자살을 하기 위해 떠났다고 한다. 그 시점에 그를 바라보면 영락없는 실패한 인생이지만 다시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이 전화위복 되어 있다. 그는 방송에서 그것이 또다른 성공의 발판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해석의 힘이다. 실패를 실패라고 해석하면 실패지만, 그것을 성공의 밑거름이라고 믿으면 그것은 성공의 밑거름이 된다. 어떤 삶도 완성된 삶이다. 실패한 삶이란 없다. 고로 어떤 결과도 마땅히 받아드릴 수 있는 결과 해석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소설은 감성적인 단편의 이야기가 인간과 고양이의 눈으로 그려진다. 읽다보니 그것들은 단편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지는 장편이다. 고양이의 눈에 보여지는 인간과 인간의 눈으로 보여지는 고양이들의 따뜻한 이야기가 꽤 흥미진진하게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