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에 의해서 꼬여버린 관계...
닦이지 않은 유리문...
풀리지 않는 관계도 있다. 혹은 풀려서는 안되는 경우도 있다. 문뜩 일과 시간에 바라 본 창에는 꼬여 있는 전선줄이 보였다. 상당히 복잡하게 꼬여 있지만, 저것들은 모두 필요에 의해 꼬여 있을테다. 멍하니 봤다. 저걸 풀었다고 나아지는 건 무엇일까. 상념에 든다. 꼬여있는 관계를 풀었다고 나아지는 건 없다는 결론에 닿는다. 그저 조금 정리됐다는 안도만 남을 뿐이다. 왜 저것들은 꼬여 있을까. 각자 다른 역할을 하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고로 저걸 풀었다고 그들의 역할이 달라지진 않는다. 사람은 본래 태어나면 딱 하나의 자아를 갖는다.
'나'
시간이 지나면 다른 자아도 받아 들인다.
'아들'
빈 얼굴 위에 하나, 둘 씌웠던 페르소나가 쌓인다. 학교를 간다. '아들', '친구', '제자'. 최근 읽고 있는 위어드(weird)라는 책을 보니, 동양인들은 자아를 사회의 요구에 따라 나눠 갖는단다. 공감된다. '서양'보다 사회가 기대하는 다른 자아가 많다. 문화는 그 곳에 정착하면서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바꾼다. 그것은 유전자처럼 전해지며 자연선택처럼 선택받는다. 더 환경에 적합한 것들이 살아남는다. 동양인들은 '자아'를 잃으면 잃을수록, '사회가 내린 정답'에 자신을 맞추면 맞출수록 살아남는다.
가정에서는 어떤 아들, 학교에서는 어떤 학생, 친구에게는 어떤 친구.
서양인들은 대게 '나'로 살아간다. '선배', '후배', '선생님'도 없다.
모두 이름이다. 처음 보는 사람도 '통성명'을 하면 이름을 부른다.
서로가 온전히 하나의 자아로 받아 들여준다.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자아를 쪼갠다. 자아가 쪼개면 쪼개 질수록 '정체성'은 혼란하다. 페르소나를 돌려가며 스스로를 잃는다. 대게 자아를 상실하면 우울에 빠진다. 자신이 누구인가. 사회가 정한 기대치에 자신을 숨기다 보면 진짜 자아는 사라진다. 그 상태로 사회가 복잡해지니, 혼자 있는 시간도 줄어든다. 자신을 인지 생각할 시간이 줄어든다. 학교, 직장에서 8시간을 지내고 가족, 친구와 나머지 시간을 지낸다. 다른 이름에만 집중하다보니 자신을 잃는다. 마치 몰입한 캐릭터를 빠져 나오지 못하는 대배우의 착각과 같다.
가면에 쌓여진 진짜 자신을 상실한다. 여러 가면만 돌려쓴다. 생을 마감한다. 동양인이 우울한 이유다.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은 '호칭'도 한 몫이다. 사회는 '호칭'을 남기고 '이름'을 지운다. 한국인은 점차 이름을 잃어간다. 본디 이름도 온전히 자아를 담지 못한다. 그것이 자아를 담을 시간도 없이 빠르게 삭제된다. '오빠', '형', '사장님', '선생님', '아빠'로 순식간에 쪼개진다. 사회는 '호칭' 속에 '표준모델'을 심어 놓는다. 표준모델에서 벗어나면 '독특하다'고 표현한다. 자신다워 지는 것보다 '표준 모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뉴질랜드에서 버스를 탄 적 있다. 버스 기사 님께 목적지를 물었다. 목적지는 'New Lynn'이라는 곳이다. 기사는 몇 번을 되물었다. 내 입에서 나오는 'L' 발음이 듣기 힘든 모양이었다. 기사는 퉁명스럽게 "영어 공부 좀 해"라고 야단하고 문을 닫았다. 인종차별적인 경험. 이 경험을 다른 이에게 말했더니, 대부분은 '버스기사'를 콧수염 난 백인 아저씨로 떠올렸다. 내 이야기의 대상은 마오리 아주머니셨다.
그렇다. 사회는 '표준 모델'을 제시한다. 거기서 벗어나지 않길 기대한다. 다만 사회가 만들어낸 '표준모델'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모델을 연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자신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을 동양은 쉽게 잊어 버린다. '공자'는 말했다.'군군신신부부자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 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이 말은 혼란스러운 시대를 정리하는 명언이지만, '사회가 만들어낸 표준모델'에 충실하라고 주문한다. '온전히 자신다워 지라'는 말은 없다. 공자가 바라는 세상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아니라, 안정된 질서의 사회다. 그 유교사회의 교육을 받으며 우린 '행복'을 버리고 '사회 안정'을 택했다. 이 질서는 아주 오랜 기간 동양이 서양 문명보다 우수하도록 만들었다.
해외에서는 껌을 씹으며 서빙하는 직원을 가끔 만난다. 지방으로 내려가면 더 쉽게 본다. 공무원이나 은행원들은 기다리는 '고객'을 두고도 자신들끼리 수다를 떤다. 특별하게 유니폼을 입었다고 자신을 잃어버리진 않는다. 우린 조금 다르다. '손님'이라는 페르소나만 걸치면 '갑'이 된다. '자신'은 없고 '갑'과 '을'만 존재한다. 손님은 손님답고 종업원은 종업원답다고 여긴다. 손님이 '왕'이라는 이상한 '표준모델'이 생기면 다수의 자아는 굉장히 괴상망측한 방식으로 바뀐다. 군복만 입으면 죄다 삐딱해지는 민방위대원처럼 사회가 만들어낸 모델로 자신을 쏙하니 집어 넣는다.
꼬여버린 관계, 그것은 풀어내도 달라지지 않는다. 잃어버린 관계는 반드시 잃어버려야만 한다. 사회가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규칙이다. 확실히 단절되고 잊혀져야 한다. 그러고 싶지 않지만 그래야한다. 사장에게는 충성을 다해야하고, 후임에게는 위신을 세워야 한다. '자신'은 없다. 그냥 그래야 한다고 '사회'가 규정했다. 그것에 자신을 끼워 넣는다. 얼마 전, 군부대의 부조리에 관한 영상을 봤다. 사회에서는 평범한 또래 대학생 친구들이 그곳에만 가면 괴롭히고 군기잡는다. 사회의 압력에 무릎을 꿇는 일이 많아지면 원치 않는 방향대로 삶은 흘러간다. 닦이지 않은 유리창으로 꼬여 있는 관계를 살피니, 더 갑갑하다. 꼬여 있는 관계를 살피는 일 같아 보인다. 조용히 혼자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짧아지면 질수록 '내'가 아닌 '표준'처럼 살아갈 것 같다. 어쩐지 일상에서도 이런 망상이 잦아지는 걸 보니 MBTI가 어느정도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아직 완독 전 생각입니다. 완독 후 2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