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에서 1일1독이 유행이었다. 물론 책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그렇다. 다만, 나는 1일1독을 하진 않는다. 1일1글을 필사적으로 지키지만, 1일1독은 지키지 않는다. 이유는 이렇다. 첫째, 하루에 한 권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얇고 쉬운 책'만을 고를 여지가 있다. 둘째,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읽어 해치우는 것이 아니라, 소화하고 '글'로 작성하는 것이다. 책을 읽는 건 쉽지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글로 써내는 것은 쉽지 않다. 셋째, 병렬독서가 훨씬 나에게 맞다. 생체리듬처럼 아침에는 아침에 더 집중해서 읽히는 책이 있고, 일과 시간에는 일과 시간에 더 집중해 읽히는 책이 있다. 화장실에서 잘 읽히는 책이 있고, 침실에서 잘 읽히는 책이 있다. 오로지 완전히 그것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호기심에 충만할 때, 그것을 읽는 것이 훨씬 더 좋다. 1일1독은 그래도 누군가에게 맞을지 모른다. 누군가라면 이런 사람들이다. 첫째, 독서 습관을 기르고 싶을 때, 책을 읽어야 하는데... 읽어야 하는데... 하고 읽지 못하는 이들에게 1일1독은 권할 만하다. 하루 하루 쌓이는 성취감도 있을 뿐더러 정해진 데드라인은 증발해버리는 짜투리 시간에 생명을 불어 넣어 줄 것이다. 둘 째, 무언가에 호기심이 왕성할 때, 가령 한 가지 주제에 꽂혔을 때는 생체리듬이 어떻고를 떠나 눈 뜨고 감을 때까지 그 생각 뿐일 때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한권 한권 독파해 내가면서 읽어가는 것도 좋다. 혹여 맘에드는 작가를 찾았을 때, 그의 책을 모조리 읽고 싶다고 느낄 때도 그렇다. 서점에서 '작가 이름'을 말한 적이 딱 두 번 있다.
"이 작가가 쓴 책은 모조리 주세요."
하나는 법륜스님, 다른 하나는 유현준 교수님이다. 별로 관심없던 주제와 사람들이었다. 어느 날, 왜 그랬는지 모르게 아주 우연하게 책 한 권 읽게 됐고, 그 뒤로 이들의 열렬한 팬이 됐다. 그들의 책은 무조건 구매하고 소장한다. 마지막 셋째, 무언가를 잊고 싶을 때, 다른 무언가에 집중하는 것은 어떤 걸 쉽게 잊게 하게 한다. '혼자 책 읽는 시간'의 '니나 상코피치'가 그랬다. 그녀는 자신의 언니의 죽음을 잊고자 1일1독을 시작했다.
어릴 적, 어머니는 문지방에 발가락이 찧이면 난데없이 허벅지를 때리셨다. 왜 때리냐고 여쭸더니, 다른 아픔이 있으면 작은 아픔은 잊혀진다고 했다. 흔히 이별한 누군가에게 다른 사람을 찾아주며 하는 말과 같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 거야."
사실 어떤 걸 잊기 위해, 주위를 다른 곳에 분산하는 방식은 꽤 효과적이다. 간혹 아픔을 잊기 위해, 다른 무언가에 병적으로 집착하여 비정상적인 생활 패턴을 갖는 경우도 있다. 지난 트라우마 때문에 다른 것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강박증이 그렇다. 대게 약물이나 술 혹은 도박과 같은 분류로 빠지는 경우도 있다. 어쨌건 무언가를 잊는 방식으로 독서를 선택하는 것은 그닥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 책은 다 저마다 그만의 치유법이 있다. '추리소설'의 경우는 대표적인 예다. 나는 추리 소설을 좋아한다. 추리소설이 주는 쾌감은 이렇다. 주어진 문제에 언제나 통쾌한 정답이 있다. 추리소설은 분명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던지고 사소한 실마리를 제공하지만 주인공은 '저자'를 이끌고 후반부에 반드시 통쾌한 정답을 찾아낸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실제로 '정답'이 없는 경우가 대다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답이 없는 문제를 골똘하게 고민하여 정답을 내놓으려 한다. 이런 이유로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문제를 풀다보면 깔끔하게 떨어지는 '정답'이 주는 쾌감 때문이다. 수필과 소설은 또다른 독서의 매력을 준다. 다른 이의 인생을 살아 볼 수 있다. 다수의 인간은 얼마 안되는 공간에서, 얼마 안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산다. 다만 소설과 수필은 전혀 만나 볼 일 없는 이들의 인생을 대신 살아보게 한다. 그 인물들은 역사적 인물일 수도 있고, 외국인일 수도 있다. 때로는 동물이나 외계인, 마법사일지도 모른다. 여러 상황과 관계를 간접적으로 접하며 사람에 대한 이해가 폭넓어지는 경험은 단순히 여행을 다니고 견문을 쌓는 일만으로 쌓을 순 없다. '대통령', '목사님', '스님', '건축가', '재벌'은 여행으로 모두 만날 수 없고 그들의 마음을 읽기 위해 식사자리에 참석하는 것도 힘들다. 그들은 혼자만의 시간에 조용히 내면을 종이 위에 기록했다. 그것으로 우린 그들의 온전한 생각을 읽어 낼 수 있다.
책을 읽다보면 자아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을 무아지경(無我之境)이라고 한다. 자아를 상실할 만큼 몰입했다는 것은 실제 자아가 상실한 것이 아니다. 이는 일종의 '자아전이(自我轉移)'다. 무속신앙의 어떤 것처럼 누군가의 영혼이 내 영혼으로 들어오는 경험과는 다르다. 책을 몰입해서 읽다보면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돌입된다. 무아지경은 자아를 잊는 경험이다. 독서로 자아를 잊는 이들은 따지고 들자면 도서의 주인공으로 자아전이(自我轉移)된 것과 다름없다. 대통령의 삶으로 완전히 몰입되어 자아가 되거나, 재벌의 삶으로 완전히 몰입되어 자아가 된다. 흔히 '육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깎아버린 손톱이 어디로 갔는지 더이상 신경쓰지 않는 이유는 '정신'이 사라진 육체는 '자아'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나를 담고 있는 육체는 '자아'가 아니다. 책은 자아전이(自我轉移)를 통해 더 폭넓은 자아를 담는다. 어떤 책을 읽는지는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에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 있다.
"우리가 살면서 굉장히 똑똑한 사람을 만났다면, 그에게 어떤 책을 읽었는지 물어봐야 한다"
그렇다. 비범할 것 없는 인간들 중, 일부는 희안하게 비범한 행동을 해버린다. 그들의 정신은 글로써 전이되고 누군가의 육신에 들어가 또 그것을 행동하게 한다.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전이된다. 바이러스는 숙주를 통해 기생하다가 전이된다. 책은 영혼의 숙주다. 이것은 무한대로 보관되다가 누군가 자아전이하는 순간 상대에게 들어간다. 즉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군가의 영혼을 넘겨 받고, 다시 나의 영혼을 어디론가 넘기는 일이다. 조지 마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책을 읽는 사람은 죽기 전 까지 1000년을 산 사람이고, 읽지 않은 사람은 하루만 살다 간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