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2월에서 1998년 2월까지의 재임기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대통령 당선 한 달만인 1993년 3월 무궁화호 열차가 전복된다. 78명이 사망하고 198명이 부상을 당한다. 같은 해 7월에는 아시아나 항공 733편이 추락하여 68명이 사망한다. 10월에는 서해훼리호가 침몰하고 292명이 사망한다. 다음해 1994년 7월에는 북한의 김일성이 사망하고 10월에는 서울 성수대교가 무너진다. 32명이 사망한다. 1995년 4월에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이 일어난다. 101명이 사망하고 202명이 부상 당한다. 사고 두 달 뒤, 서울 서초구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진다. 총 502명이 사망하고 1,000명에 가까운 부상자가 나온다. 다음해인 96년 9월에는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일어나 18명이 사망하고 27명이 부상을 당한다. 재임기간 한 번을 경험해도 쉽지 않을 이벤트가 다량으로 발생한다. 다만 가장 큰 이벤트는 그 다음해에 일어난다. 97년 여름에는 태국에서 외환위기가 일어난다. 태국 외환위기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로 번지며 동남아시아 국가로 확산한다. 외환위기는 아시아 전역으로 번지고 대한민국도 큰 타격을 받는다. 외국자본이 아시아에서 유출되기 시작했다. 외환 보유고가 바닥났다. 97년 1월에 재계 14위였던 한보그룹이 부도가 난다. 3월에는 삼미, 4월에는 진로, 5월에는 삼립과 미도파가 부도나고 7월에는 기아, 10월에는 쌍방울, 11월에는 뉴코아, 해태, 12월에는 한라그룹이 부도난다. 당시 재계순위 3위였던 대우가 얼마 뒤인 1999년에 부도를 맞이 하면서 한국전쟁 이래 최대의 재앙인 '국가부도'를 맞이 했다. 금융실명제와 역사문제에 적극적인 액션을 취하던 '문민정부'의 지지율은 초반 과감한 개혁으로 90%가 넘는 엄청난 지지율로 시작을 했으나 집권 말기에는 한 자리 숫자인 6%까지 추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치 뿐만아니라, 사람 사는 일이 그렇다. 실력과 노력만으로 모든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시기와 때가 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한다. 그처럼 뭐라고 정의 할 수 없는 여러가지 우연을 통칭하여 '운'이라고 부른다. 김영삼은 서울대학교에서 당시 인기 학과였던 철학과를 졸업 했으며, 학점 받기 어렵다는 당시에도 졸업 학점이 4.0만점이었다. 26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고 군부독재 세력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반대로 전두환은 기가 막히게 운이 따른다.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한다. 한국 전쟁 중이던 당시, 대부분의 합격자들이 '전선 투입'을 우려하여 입학을 취소하자, 그는 보충 인원에 있다가 추가 합격으로 들어간다. 기가 막히게도 전쟁은 3년만에 종료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신뢰를 받고 소령에서 중령 진급을 1년 2개월만으로 초고속으로 한다. 또한 보안사령관을 맡고 있던 당시에는 드라마틱한 일이 일어난다. 대한민국 정보 기관이던 중앙정보부 부장이 현직 대통령을 암살한 것이다. 이로써,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보기관의 수장이 동시에 공석이 된다. 이로인해 대한민국 안보문제를 명분으로 집권한다. 이로써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하게 국민 직접 선거를 치르지 않고 대통령에 선출된다. 단 한번도 당선된 적 없이, 11대와 12대 대통령을 역임한다. 임기 후반에는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의 3저 호황의 시대를 맞는다. 당시 일본의 플라자 합의 덕분에, 수출경기도 호황을 맞는다. 또한 이후 반란수괴죄 및 살인, 뇌물수수 등으로 1심에서는 사형, 2심에서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나, 실제 2021년 11월 23일가지 천수를 누리다 향년 90세의 나이에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는다. 그로써 비교를 해보자면, 운이라는 것은 참 중요하기도 한 듯 하다.
국가부도라는 최대 이벤트로 김영삼 대통령의 모든 업적이 희미해졌지만, 그는 1994년 말, 세계화를 정부 정책 캐치프라이즈로 내세우고 정보통신부를 내세워 현재 대한민국의 토대를 만들었다. 정보통신부는 세계 최초의 코드 분할 다중 접속인 CDMA 방식의 이동 통신을 상용화했다. 그 밖에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의 일생이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와 맥을 같이 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국민성이라는 말을 그닥 좋아하진 않지만 대한민국은 지도자의 재임 기간이 짧거나 그 평가가 박한 편이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고위직 지도자의 평가가 박하고 짧은 편이다. 조선시대도 '황희 정승'을 제외한다면 고위관리의 임기가 짧았다. 왕권이 강했던 태조에서 연산군까지 조선 초기에는 왕을 견제하는 '대사간'이 해마다 서너 번씩은 교체될 정도였다. 실제도 흥선대원군 집정기에는 10년 간 183번이나 그 자리가 교체되기도 했다. 현대직위로 보자면 '서울시장' 정도에 속하는 '한성판윤' 자리는 조선왕조 518년 간 1,375번이나 바뀐다. 이런 짧은 지도자들의 수명은 비효율과 비능률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런 짧은 교체 주기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는 518년이라는 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흔히 '냄비'라고 부르는 빨리 식고, 빨리 끓는 감정에 적합한 정치 형태이지 않을까 싶다. 이런 이유로 역시나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빠르게 뜨거웠다가 빠르게 식어 버린다. 각자의 정치인의 삶이 적절한 역할을 했듯, 김영삼 대통령의 이야기를 보며, 미래를 먼저 살고 있는 입장에서 어쨌건 군더디기 없이 현재에 뿌리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